입체적인 낭독극
데뷔작이었던 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에서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배우님, 잠시 얘기하고 싶다는 분이 계세요.”
그날 기억으로 내가 아는 지인들은 이미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또 누가 나를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만나고자 하는 걸까? 두근거림과 약간의 긴장감을 안고 퇴근하는 길에 나와 얘기하고 싶다던 그분을 만났다. <수페로 프랑켄슈타인>을 쓰고 기획하고 계시던 창작집단의 대표님이셨다. 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하면서 그다음에 할 차기작으로 오디션 신청서를 냈었는데, 우연찮게 그 대표님이 내 공연을 보셨던 것이다.
“배우님 공연 잘 봤습니다. 저희 공연 오디션 지원서를 내셨더라고요. 오늘 너무 좋게 봐서 2차 오디션에서 꼭 뵙고 싶네요.”
얼떨떨하게 붕 떠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짧은 대화를 마쳤다. 될 놈은, 된다고 하던데…. 나, 어쩌면 될 놈이었던 걸까? 데뷔 무대에 이어서 바로 작품을 하게 되다니. 내게 이런 행운이 온 것이 믿을 수 없다고 하자 대표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온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2차 오디션까지 무탈히 마치고 <수페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에 함께 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하게 된 이 작품은 “입체”낭독극 형식이었다. 리딩극의 무대는 몇 번 본 일이 있었는데, 입체적인 낭독은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처음이라 꽤나 새롭게 다가왔다. 앞에 보면대를 세워놓고 낭독을 하되, 움직임의 범위를 크게 쓰며 하는 공연 형태였다.
그런데 이 공연은 사실 입체낭독극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우리 배우들과 연출부 사이에선 이건 “낭독연극”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극은 총 3막으로 나뉘는데, 1막에서는 보면대 앞에 앉아 읽는 여느 리딩극 같이 진행되었고, 2막은 보면대 근처 영역을 맴돌며 어느 정도의 움직임을 넣더니, 3막에서는 아예 보면대를 치워놓고 연극과 마찬가지로 동선을 만들어 움직였다. 배우로서는 처음부터 아예 연극으로 만들었으면 더 몰입되고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그런데 관객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인물들이 책을 읽어주듯이 진행을 하다가 어느 순간 서서히 그 현장 속에 관찰자로 함께 존재하게 되는 느낌을 받는 이런 연출 형태가 더 지루하지 않게 관람하기에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와 객석은 정말 가까웠다. 맨 앞 줄과 무대는 관객이 배우의 안면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과 호흡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뮤지컬이 아닌 연극으로 무대를 접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원래 뮤지컬을 더 선호하기도 했고, 뮤지컬 특유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좋아했기 때문에 연극은 조금 잔잔하고 지루한 느낌이 있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하며 온전히 말로써 어떠한 이야기의 의도를 섬세하게 전달한다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섬세함. 나는 연극의 섬세함이 좋아서 이때부터 연극에 빠져들었건 것 같다. 그렇게 어찌 보면 그때부터 수많은 갈림길 중 비로소 하나의 길을 선택하여 걸음을 뗄 수 있었던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