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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아 Nov 23. 2023

입체낭독극 <수페로 프랑켄슈타인> (2)

출산, 그리고 부모자식관계


  소년들의 시체로 완벽한 자신의 피조물을 만들고자 한 비비안, 산후정신증으로 미쳐버린 저스틴, 그리고 방치되어 최소한의 세상만을 보며 살아야만 했던 피조물. 이들은 원하든 원치 않았든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었다. 본극의 근본적 기획의도는 소수자(queer)의 연대와 그들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지금 여기에선 이 부모자식관계라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최근 주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지인들이 많아졌다. 아니, 임신 소식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 많지 않은 나이인데도 참 그렇지. 생각해 보면 내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 즈음에 결혼하고 오빠를 낳았다. 현재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혼, 비출산을 지향하는 내게 생명의 탄생이란 사실 조금 기괴하게 다가온다. 본극의 작가의 말을 빌려, “내 뱃속에서,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닌 존재가 툭 하고 나왔다는 것”은 어찌 생각해 보면 조금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늘상 “생명의 탄생은 성스럽고 신비로운 것이에요.”라는 교육이 썩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는 출산이라는 이벤트는 나로 하여금 영화 <에일리언>을 떠올리게 한다. 숙주의 몸에서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고 나갈 때가 되면 알아서 문을 벌리고 몸을 비틀어 세상 밖으로 나가는 낯선 생명체. 그 생명체는 지능을 가지고 학습을 하여 자아를 갖게 된다. 이 과정이 신비로운 것은 맞지만 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괴이함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쪽에 가깝다. 언젠가(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또 말이 달라질지 모르겠으나, 얼기설기 시체들이 기워진 피조물의 끔찍한 형태의 묘사가 나의 이런 생각들에 색채를 불어넣었다.


  그렇기에 나는 첫 대본을 받았을 때 <저스틴>이라는 인물에 가장 이입했었다. 별다른 보호를 받을 수도, 가진 힘도 없는 “소수자”인 내게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평생을 책임져야 할 존재라니! 저스틴의 말마따나 그것이 마치 사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결국 모성애와 감성을 자극하는 “끔찍한” 피조물로 인해 정신증을 극복하고 그와 단단한 관계를 맺는 것은 참 인상적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비비안>이 있다. 비비안은 배로 낳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직접 창조해 낸 피조물을 처음 마주쳤을 때,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조물은 자신과 분리된, 자신의 소유물로서 여기며 말 잘 듣는 완성도 높은 “피조물”로 키우려 한다. 그를 아끼면서도, 제한된 환경에 가두어 제한된 교육을 하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를 키운다. 현대 우리 사회의 모습과 어쩐지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비비안이 보편적인 한국의 권능적 어머니를 표상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었으니, 넌 내 말을 따라야 해.” 물론 그렇지 않은 어머니가 훨씬 많을 것을 알지만, 자식을 본인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 같은 것이리라.

  결말을 보자면, 마지막 장에서 피조물은 평생 해 본 적 없던 말대꾸와 반항을 하더니, 감옥 철창을 뜯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제 창조자의 목에 안정제가 든 주사를 꽂아버린다.

  나는 피조물을 연기했기에, 피조물로서 비비안에게 애증을 잔뜩 느꼈다.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비비안이었고, 관계를 맺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사랑을 갈구하며 하라는 대로 하였으나 결국 괴물 취급받는 소유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면하였을 때 억눌러왔던 감정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렸다. “태어나게 했으면, 그냥 날 좀 내버려 둬요! “ 피조물이 울분에 차 터뜨린 대사였다. 부모의 입장에선 뭐, 꽤 충격적인 발언일 수 있겠으나 이미 자아가 생겨버린 생명체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에 당연할 터였다.


  당시 공연을 보러 와 준 친한 언니가 “난 비비안에 이입해서 부모에게 대드는 걸 보면 난 머리끝까지 화가 날 것 같다”라는 관람평을 남겼다. 부모와 자식은 이렇게나 입장이 다르다. 나는 오롯이 피조물에 이입했기에 책임감 없이 만들어놓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부모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연대 이야기로도, 다양한 여성 군상의 이야기로도 이 작품은 매우 훌륭했지만, 내게는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관계를 이토록 설명한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다. 안타깝게도 낭독 형식으로 4회밖에 공연을 올릴 수 없었지만, 여건이 된다면 꼭 본공연으로 돌아와 줬으면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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