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
같이 가자. 같이, 꽃 보러 가자
소년들의 시체 조각들을 모아 <피조물>을 창조해 낸 <비비안 프랑켄슈타인>. 그는 그의 피조물을 작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 신문이나 글 등을 가르쳐주며 좀 더 완벽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양육한다.
어느 날 프랑켄슈타인 가의 하인 <저스틴 모리츠>가 산후정신증에 시달리다 피조물의 옆 감옥에 끌려와 갇히게 된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저스틴은 피조물을 망상이라 여기고 그와의 대화를 시작한다. 피조물은 저스틴과의 대화에서 신문 파편 따위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되며 바깥세상에 대해 궁금해지고, 둘의 관계에는 특별한 것이 자리 잡게 된다.
온전히 나의 소유인 것도, 나와 동떨어진 것도 아닌 나의 “자식”, 나의 ”피조물“. 그것을 완벽히 나의 의지대로 나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하는 비비안과, 자신의 뱃속에 잉태되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자라나는 그 생명체에 잡아먹힐 두려움을 느끼는 저스틴은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페로 프랑켄슈타인>은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선보인 입체낭독극으로 <메리 셸리>의 sf 원작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젠더 스와프 하여 재해석한 작품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모두 여성으로 다양한 여성 군상을 보이는데, 특히 소수성을 띤 사회적 약자인 저스틴과 피조물의 연대는 세상에 삶의 근본적 의미를 묻고, 그들이 그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비안의 세계만이 전부였으며 그가 보여주는 것들만이 안전한 것이라 여겼던 피조물이 저스틴으로 인하여 스스로 호기심을 일으키고 두 발로 일어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감히 감옥 문을 부수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소수의 연대로 인한 가능성이었다.
입체낭독극 <수페로 프랑켄슈타인>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은 <피조물>이었다. 여성으로서,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로서, 그리고 한 여성의 “자식”으로서도 여러 의미를 곱씹어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으나,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더욱이 응원의 노래로 들릴 만한 것이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나는 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곳에 존재했다. 어둡고 눅눅한 이 공간은 매번 주인님이 바깥에서 가져다주는 신문지 조각을 여러 개 붙여 놓은 것 정도의 크기에, 소름 끼치는 냉기로 빛나는 막대기 모양의 창살로 ‘바깥’이라고 하는 곳과 분리되어 있었다. 바깥에는 무섭고 위험한 것들이 잔뜩 있다고 했다. 주인님은 내 편이고 나는 주인님의 편이라고 했으니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나는 그저 이 작고 안전한 공간에서 지금처럼 주인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싶다. 주변은 아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주인님의 말대로 조금 더 완벽해지면 주인님도 기뻐하실 테지.
밤에 누군가 괴성을 지르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주인님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괴성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 창살 속 공간에 끌려들어 갔다.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은 주인님에게 주사를 맞더니 잠잠해졌다. 그리고 주인님은 미친 사람과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주인님은 늘 옳으니까.
그 괴성의 사람은 혼자 소리치다가 웃다가 시끄럽게 굴었다. 나보고 사탄이라느니, 잡아먹지 말라느니, 참다못한 나는 그를 멈출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나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내게 ‘고향’에 대해, ‘꽃’에 대해, ‘예쁘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노래’에 대해 알려주었다. 오락가락 이상하게 구는 이 미쳤다는 사람을 보면, 자꾸만 생소한 감정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이 사람에게서 자꾸만 처음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고 드러내게 된다. 나도 덩달아 오락가락해지는 것만 같다.
… 당신이 내 엄마였더라면, 어땠을까? 내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며 사랑을 갈구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 나서는 후련하게 웃으며 ‘따뜻한’ 그 손을 잡고 잠에 들 수 있었을까?
당신과 나를 가로막은 창살 틈 사이로 당신의 손을 잡았다. 이것이 ‘따뜻한 것‘. 내가 처음 느껴보는 것.
그에게 내일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정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곳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테지만 그가 ‘예쁜’,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대신 전해주는 것만으로 나는 기쁠테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같이 나가자. 같이, 꽃구경 가자.”
그는 내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냐고 물었다. 어째서인지 두렵기만 했던 바깥은 그와 함께라면 마냥 예쁘기만 할 것 같았다. 처음으로, 이곳에서 ’ 나가고 싶다 ‘,라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눈을 떴을 때, 저스틴이 없었다. 마치 나와 있던 것이 망상이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속에서 무언가 울렁거려 토하고 싶었다. 주인님은 그런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를 자식으로, 사랑해 줄 거라 믿고 싶었던 주인님은 나를 괴물, 이라며 그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을 거라 했다. 당신만이 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라며, 난 당신의 말을 따라야만 하는 당신의 소유인 창조물이라며. 눈앞이 흐려지며 머릿속에서 무언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나는 당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것’. 여전히 소름 끼치는 철창을 뜯고 비로소 당신에게 닿았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인님의 목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안도와 함께 두려움이 날 집어삼켰다. 온몸의 조각난 신경들이 한꺼번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작은 아기를 안고 있는 저스틴이었다. 모든 상황을 본 그가 내가 괴물이라고 다시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없어져 버릴까 무서워서 조용히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 내게, 저스틴은, 손을 내밀었다.
“같이 나가자. 괜찮아.”
내 발목을 붙들고 나가지 못하도록 끌어당기던 안개들이 서서히 걷히는 듯 했다. 저스틴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빛이 새어 들어왔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보는 빛이었다.
“괜찮아, 이리 와!”
나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꼭 감고 당신에게로 뛰어갔다.
A Cre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