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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아 Nov 02. 2023

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 (2)

잔인한 현실과 거짓된 행복


  2021년, 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에 들어가기 전 배우들에게 던진 프로그램북에 구성될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만약 아름다웠던 그때로 돌아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면 거짓된 행복과 진실된 불행 중 어느 손을 잡겠습니까?”


   나에게는 퍽 어려운 질문이었다. 최근까지도 행복한 꿈을 꾼 날이면 하루종일 그 세계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극 중 <로즈>는 사고로 연인 <에델린>을 잃고, 그린우드 연구소장인 <시에나>는 전쟁으로 사랑하는 언니 <가브리엘>을 잃는다. 자신의 세상을 이루는 가장 큰 부분이었던 사람이 사라지고 사무치게 아파하던 이 둘은 마치 중독된 것처럼,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드리머>를 매일 밤 찾게 된다.

  그러나 드리머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기억력 감퇴와 환각, 환청,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억 속의 모든 얼굴이 가장 그리운 그 사람의 얼굴로 바뀌게 되는 것. 같은 아픔으로 드리머를 찾았던 로즈와 시에나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각각 현실과 행복으로 향하였다.


  둘의 선택은 모두 이해할 만하다. 그저 시에나는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버거우리만큼 컸고, 로즈는 현실에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멜>의 목소리에 잊고 있던 또 다른 행복을 기억해 냈을 뿐이었다.


  나는 <로즈>를 연기한 배우였기에 로즈의 시선으로 이 극을 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로즈의 입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한 사람과의 기억은 그 사람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에델린이 로즈의 마지막 환상 속에서 그녀를 보내주며 건넨 말이다.


  로즈에게 가장 강렬한 행복은 에델린이었지만, 그로써 만들어낸 행복에 잠식되었을 때 그것을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 강렬한 행복만이 지속되는 세상에 빠진다면 인간은 언젠가 권태로움을 느끼고 그 저주같은 감각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절망할 테다. 그 순간 밀려올 공허함과 고통은 오히려 불행한 현실 속에 살아갈 때보다 배로 잔인해지지 않을까.


  내가 배우로서 로즈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가장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한때 그러했다. 어떻게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술이나 담배에 의존해보기도 하고 해야 할 일들을 제치고 하루종일 잠만 자기도 했다. 그럼에도 텅 빈 마음은 절대 채워지지 않았기에  잠들기 전 “오늘 밤 눈을 감으면 영영 다시 눈 뜨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빌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 모습은 참 안쓰러우면서도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그것을 이루어주는 내 사람들을 잊은 채, 견뎌내기 위해서 스스로를 가둬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내게 던져진 “거짓과 진실 중 어느 손을 잡겠느냐”하는 그 질문에 나는 당연히 영원한 행복이라면, 설령 거짓될지라도 그것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날 부르는 허상의 행복은 잔인하리만치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즈는 나와 같으면서 다른 인물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어떻게든 극복해 내려 발버둥 치고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로즈의 그 모든 과정을 따라가며 수많은 감정들과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이토록 연약하면서도 현명한 인물이라니, 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나의 본체에 빗대어 덩달아 위로를 받고 깨달음을 얻은 작품이었다.

2015. 11. 28. 22:07 기록


  어쩌다 하루는 2015년에 내가 블로그에 일기처럼 썼던 기록을 발견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비슷한 걱정과 고민을 안고 살았구나, 그래서 내가 로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굳건히 삶을 살아갈 힘을 쥐어 짜낸다는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고 있다. 근래에는 종종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찾아본다. 추억이라는 것이 사실보다 미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내 삶이 그렇게 참혹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돌이키게 된다.


  어찌 보면, 나는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쓰러질 것 같을 때 즈음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줄 사람이 적어도 두 명 이상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아서 외출을 할 때면 노곤한 눈빛으로 내게 인사를 보내준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옥상에 잠시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과 별이 또렷하게 빛나고 가끔은 누군가를 태운 비행기가 어딘가로 여정을 떠나는 길도 보게 된다. 강렬한 행복 속에 중독되어 영원히 잡혀있게 된다면 느끼지 못할 사소한 평안함과 행복함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지금까지 나에게 선물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도 거짓과 진실 중 하나를 택하라는 그 질문을 들으면 순간적으로 망설여지긴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진실을 선택할 테다. 내가 기억해야 할 행복은 하나가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어 견디기 위해 날 가둔 건 바로 나였어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게

너와 나의 세상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너와 함께 할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_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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