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윌로 그린우드
네가 이미 알고 있던 행복에게로 데려다줄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영국.
전쟁 후유증으로 발생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던 가운데, 세계적 명성의 <제인 그린우드 뇌신경과학 연구소>는 행복한 기억을 꿈속에서 완벽히 재현하는 신약 <드리머>를 출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 폭발 사고로 인해 드리머 공동 창시자였던 <에델린 헌트>가 사망하고 만다.
몇 년이 흐르고, 드리머를 복용한 사람들에게서 수차례기억력 감퇴와 기억의 오류 등의 숨겨진 부작용이 보고되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맴도는 그린우드 연구소의 사람들과 새로 부임하게 된 연구원 <이브닝 프림로즈>. 그들이 마주하게 될 현실은 무엇일까.
한 번 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가장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드리머의 시작은 단순했다. 에델린 헌트의 연인이자 신경외과 의사였던 제인 그린우드 박사의 딸 <로즈윌로 그린우드>. 전쟁으로 부상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러 파견을 다니며 그들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로즈는 “계속 하나의 기억에 머물러 있을거라면, 차라리 행복한 기억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넌지시 말하게 된다. 에델린은 자신의 연인이 말한 것을 약으로 개발하여 실현시키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로즈의 일상에 치명적인 바람을 일으킨다.
로즈는 점차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들어낸 행복에 잠식되어갔다. 로즈를 사랑하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입양 자매인 <멜 그린우드>는 그런 로즈의 진짜 행복을 위한 길은 무엇인지 갈등하다, 기억 속에 헤매는 로즈를 간절히 불러본다.
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내가 극중 맡았던 인물은 로즈윌로 그린우드였다.
뭇 이별이 그러하듯, 나는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나의 연인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 무엇보다 의지하고 있던 내 사랑이, 그와의 기억들이, 저 사나운 불길에 무너져버린 연구소 안에서 잿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을 두눈으로 보고야 말았다. 숨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제발 모든 게 꿈이길, 눈을 감았다 뜨면 잠에서 깨어나 그 아이가 다시 날 향해 환하게 웃어주고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헛된 소망이었다.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날 놓아주려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애써 이 끔찍한 슬픔을 잊어보려 일에 몰두했다. 아무리 멀고 열악한 곳이어도 무리해서라도 자원하여 의료 파견을 나갔다. 그럼에도 그 아이의 얼굴, 그리고 모든 게 사라진 그 순간은 점점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다.
두려웠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나 홀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러다 어느 순간 나 조차도 그 아이를 잊게 될 것만 같아서. 날 보며 웃어주고, 안아주던 그 아이의 모습을 나는 영영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 드리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날 밤, 잠에 들자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웃으며 팔을 벌려 날 꼭 끌어안아주었다. 아아, 그리웠다. 따뜻하다. 행복하다. 제발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이 순간을 놓고 싶지 않았다. “놓고 싶지 않다면 붙잡혀주려나.” 그렇게 나는 매일 밤, 그 아이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불행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나를 가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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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찾던 자료가 손에 들려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멍하고 정신이 없어졌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그럴리가 없는데, 나는 분명 그 아이와 함께 거기에 있었던 순간이 머릿속에 또렷한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자꾸만 귓가에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로즈, 로즈!
에델린, 내게 행복했던 기억은 온통 네 얼굴 뿐이라 나의 모든 세상이 너로 점철되어버렸나봐.
내가 너에게 갈게. 같이 있으면 앞으로 헤어지지 않아도 되겠지.
달맞이꽃밭이다. 기억나.
“네가 좋아하는 달맞이꽃,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가득 피워줄게. 그럼 우리도 여기서 또 만나자. 약속!”
이 달맞이꽃, 기억나? 우리 같이-,
…같이? …너랑…?
“가장 강렬한 행복이라고 해서 아주 특별한 게 아니더라. 한 사람과의 기억은 그 사람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다녀와, 로즈. 나 여기에서 잘 기다리고 있을게.“
아, 기억났다. 내가 기억해야 할 약속은 하나가 아니었다. 멜, 너였구나. 현실에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던 목소리는.
에델린, 난 그저 한 번 더 너를 만나고 너와 말하고 싶었어. 너와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게. 이제 너를 보지 못한대도, 영영 너를 잊어버린다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기억할게.
눈을 뜨자, 거기에 멜이 있었다. 우리가 또 만나기로 했던 달맞이꽃밭에서.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준 네게 천천히 다가갔다. 달빛 아래 활짝 피어난 달맞이꽃을 향해-.
-Rosewillow Green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