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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아 Jun 11. 2024

여름의 초입에서

껍데기는 가라


  날이 많이 더워졌다.

  날씨에 컨디션이 크게 좌우되는 나에게 여름은 정말 치명적인 계절이다. 까꿍, 하며 날 놀라게 하기라도 하듯 성큼 다가온 더위와 습기에 나는 제대로 타격을 받고 말았다. 자꾸만 멍해지는 정신을 애써 되찾겠다는 핑계로 차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숟가락 퍼서 입안 가득 넣어본다. 그래도 더위에 녹아버리기 직전인 몸뚱이는 쉽게 정신을 차릴 줄을 모른다. 앞으로 매년 여름은 “역대 가장 더운 여름”으로 기록될 텐데, 남은 내 수명의 여름들을 잘 버텨낼 수 있을는지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


  여름의 초입, 6월.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버린 시점이기도 하다. 이제 막 여름이 찾아옴과 함께 나도 뭔가를 시작해 보려는데, 이미 일 년의 반까지 달려왔다는 사실은 매년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이런…, 뜻은 확실히 아닐 테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나답게, 이런 시기엔 잡념의 파도에 쉽게 휩쓸리곤 한다. 앞으로 계약이 2년 남은 전세방 침대에 가만히 누워 라디오를 틀어놓고 선풍기 바람을 쐬다 그 물결은 일렁였다. “2년 뒤 나는 어디에 있을까?” 처음 홀로 상경하여 조금씩 꾸려나간 나의 생활환경과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천천히 눈앞에 오래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러모로 취약한 이 몸뚱이의 엔진을 억지로 가동해 어떻게든 뭔가를 이뤄내고 잠시 절전모드에 들어가면 잠시 가려두었던 나태함과 무기력힘이 머릿속에서부터 스멀스멀 발끝을 향해 퍼져나간다. 그 기분이 퍽 불쾌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도 해보고 괜히 집안을 뒤집어엎어 청소나 빨래도 해보지만, 요 근래 나를 찾아오는 그것은 질펀하게 나를 붙들고 늘어진다. 사실 내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 그동안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문득 다른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몸 껍데기만 입력해 둔 루틴대로 움직이고 있는 이상하고 미묘한 느낌. 마음의 재정비도 할 겸,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해보려는데 시작부터 삐그덕거리던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뭘 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나의 가치는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지 등과 같은 물음을 던졌을 때 대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숨쉬기에 존재하고 시간이 흐르기에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간 느꼈던 울적함이나 공허함과는 또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이것도 “역대 최악의 여름” 탓일까….


  습기를 가득 머금은 더운 초여름 밤바람을 맞으며 오늘도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그런 생각이라도 뭔가를 시작하긴 시작한 것도 같다. 시작이 반이라 하였으니 이 눅진한 생각들의 꼬리도 곧 보일 테지. 그 시점이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나의 껍데기 속 알맹이에 다시 생기가 돌기를, 아니, 껍데기 없이 꽉 찬 알맹이로서 살아내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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