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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강 Dec 14. 2023

바다가 된 호수, 사해[신혼여행은 처음]

수량이 줄어든 요단강, 말라붙고 있는 사해. 기후위기를 체감하다.

"요단강은 건너지 말어."


요르단으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하자 친구가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라는 얘기다.

요르단강(Jordan River·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는 탓이다.

그런데 천국에 가려면 이생을 마무리하는 게 순서다.

요단강을 건너는 건 단편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하기에 슬픔이지만,

나아가서는 천국에 이르기에 축복이다.


이 얘기는 거슬러가서 출애굽기와 닿아 있다.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이집트 애굽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던 동족을 데리고 떠난 땅은 가나안이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다.

여기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요단강이다.

강건너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었다.

요르단강 마주한 모세와 일행은 재면서 방황하다가, 만다.

결국 천국을 가지 못하고 예수에게 혼이 난다.

예수 세례지의 성수를 마시는 고양이. 원샷할 기세다. 사람들은 이 물을 손에 묻혀 몸에 바르며 의식을 치른다.

요단강을 마주해 보니 왜 못 건넜는지 모르겠다.

건기(3~10월), 내 눈에 비친 요단강은 시내같이 졸졸 흘렀다.

이 강을 경계로 동서로 나뉜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요단강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 

우기(11~2월)에는 물이 불기는 한단다.

그래봐야 폭이 1미터가 넘고 깊이가 수미터 정도라 아마도 우리의 하천 정도다.


이 강이 마르고 있어서 문제라고 한다.

예수세례지(Baptism)에서 만난 가이드는 자신이 어려서는 건기에도 강을 걸어서 건너지 못했다고 했다.

중년 남성(으로 보였는데 아니면 미안한) 얘기이니 수십 년은 된 기억일 것이다.

그 새 수량이 많이 줄었다는 의미다.

요단강은 예수가 서른에 세례를 받고 몸을 씻은 곳이다.

전 세계 기독교인이 순례를 오고 관광객 발길이 닿는 성지가 있는,

요단강이 마르고 있단다.

사해에 가보니 요단강이 마르는 게 보였다.

사해 리조트에서 바라본 석양. 사진 왼쪽 아래에 사해로 난 길이 보인다. 예전에는 여기가 사해였다. 건너편은 서안지구.

요르단 여행 이틀 차, 수도 암만에서 첫날을 묵고서 아침에 서둘러 사해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으로 두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였다.

교과서에서 배웠고 SNS에서나 보던 사해를 볼 생각에 몸이 꽤나 들썩거리면서 차를 몰았다.

사해로 가는 길은 예수세례지를 거쳐갔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서 일부러 갈 생각은 없었는데,

가는 길이라고 하니 들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앞서 예수세례지 가이드를 만나 얘기를 들은 것이다.

관광을 마치고 사해로 가면서 사뭇 진지하게 다짐했다.

오늘부터 씻을 때 물을 아낄 것이다.

요르단에서 바라본 사해. 너머로 보이는 지역은 서안지구 아니면 이스라엘이다. 사진의 사해 건너 땅은 이스라엘.


사해는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묵기로 한 리조트에서 사해까지는 수백 미터, 걸어서 수분 거리였다.

아니 도대체 왜 사해에서 떨어뜨려 리조트를 지은 것인가 하는 투덜거림이 절로 나왔다.

가만 보면 개발업자라고 해서 그러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대체 왜! 리조트를 사해 멀리에다 지은 걸까.

답은 간단했다.


사해가 멀어진 것이다.


사해의 주된 수원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이 말라가면서 사해로 들어가는 물이 줄었다.

자연히 증발해 버린 사해는 이전보다 수심이 얕아졌고 그래서 우리한테서 떠나간 것이다.


예전에 사해였던 땅에서는 지금 나무가 자란다.

리조트는 물이 마른자리를 정원으로 꾸미고서, 대신 그 자리에 과거 여기가 사해였다는 연도 표지판을 세워뒀다.

사해로 가는 길은 이런 연도 표지판의 연속이었다. 

표지판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기후위기는 막연함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뉴스를 보면 요르단국은 사해 수량을 늘리려고 저 멀리 남쪽 홍해에서 바닷물을 끌어오려고 시도한다고 한다. 

그런데 환경단체의 반대와 천문학적인 비용이 걸려서 그러지 못한다.

처음 한 발자국 떨어졌을 때 붙잡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무심한 새 저만큼까지 갔다.

멀어지는 사해를 보면서 문뜩 관계란 무엇인가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사해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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