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아들 시점
폭주 기관차였다. 그 누구도 막지 못했을 것 같았다. 오토바이로 비포장도로를 폭주족처럼 질주했다.
솔직히 부모님을 원망도 했다. 열여덟 살 때 제대로 정신과를 보내지 않은 걸 탓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망가진 거로 생각했다. 또한 여태까지 뱉었던 모진 말들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런 기억을, 망측한 추억들을 잊기 위해 술이라는 자동차를 타고 인생이란 도로를 질주했다.
끝이 보이지 않고 광활한 도로에 친구를 끼웠다. 그들도 나랑 같은 자동차를 타고 어울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상해졌다. 친구들의 자동차는 중간에 멈춰 쉬거나 기름을 넣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쉰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것도 고통이었다. 연이은 숙취와 자해하는 주사 겹쳤다.
누군가는 막아줘야 했다. 기름이 떨어져 이 질주가 끝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았다.
선뜻선뜻 나서는 이가 하나도 없을 때 몸으로 막아선 사람이 두 명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달리는 자동차를 겁넬 법도 한데 그들은 몸을 던져 차를 세웠다.
세운 차를 보자마자 나는 또 다른 고통이 이어졌고 다시 달렸다.
그렇게 멈췄다가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서서히 속도가 줄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속도가 줄고 쉬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늘 부모님이 곁에 있었다.
정신과 치료, 상담,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건 사실 어려운 길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 도로를 통제하고 봉인했을 뿐이었다. 통제와 봉인은 사라졌다.
부모님은 그것을 깨부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조금씩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혹여나 깨부쉈을 때 나의 변화에 관한 걱정이 먼저 앞서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부모님은 성공적으로 나를 인도했다. 술도 끊었으며, 먹는 약물도 심했을 때보다 훨씬 줄었다.
그렇게 정신적인 여유가 좀 생겼다. 되돌아보는 나는 많이 처참해져 있었다는 걸 느꼈다.
술에 찌든 삶, 피폐한 정신, 느슨한 육체 이 삼박자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처음 되돌아볼 때는 이기적이게도 나만 중심적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그런데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니 고통은 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술에 만취하는 날이면 친구들에게 자살할 거라고 자해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들은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의 친한 친구가 모진 말을 뱉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아마도 큰 곤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곤욕에 관한 대처는 나를 떠나는 것과 친한 선에서 벗어나 지인으로만 여기는 정도였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거리를 두는 게 더 이로울 테니까. 가까이 두어서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감정만 소비되고 얻는 게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번엔 처지를 바꿔서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왜 이렇게 표현했냐면, 나는 부모라는 존재가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하나가 있다. 부모님은 매일 출근하기 전에 내 방문을 열어 확인 후 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잠에서 살짝 깼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왜 그러는지 물어봤다.
‘아들. 아빠는 네가 진짜 죽을까 봐 무서워.’
어머니는 기억에 남는 말은 없지만, 내가 불안증세가 있을 때마다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며 지켜주었다.
흔히들 자식이 먼저 죽는 고통은 창자가 끝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내 인생은 나 혼자만 존재하지 않는다. 낳아주고 길러준 물보다 진한 피가 있는 관계의 인생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만약에 자신이 힘들다면 누군가를 찾기보다 같이 있어 주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좋겠다.
대부분 그 대상은 부모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는 걸 강조할 정도로 사랑하니까.
그 사랑을 받은 사람도 자신일 거고, 여태까지 제일 많이 바라볼 사람이니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할 정도의 그런 존재니까.
곁에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먼저 씌워주는 행동을 해주었다.
어깨가 아파도 비에 맞아도 늘 괜찮다고 말하며 다독여주었다. 슬픔은 나누면 적어진다는 말을 이제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