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없었으면

가느다란 사랑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by 집안의 불청객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이렇게 쉽게 끝나버릴 관계일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도 말 걸 그랬다.


그렇지만, 이런 말이 쓸데없다는 것도 안다. 이미 경험해 버린 걸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만약에라는 가정이 사실 제일 쓸데없다. 그러나, 연인 관계에서 만약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된다.


내가 죽으면 어쩔 거야, 나랑 헤어지면 어떨 것 같아 이런 말들이 오고 간다.


대부분의 질문은 이별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잡는다거나 같이 죽는다거나 그런 말을 지껄였다.


그 가정이 이루어졌다. 아니, 결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바로 다시 가정을 시작했다.


없었다면, 네가 없었다면 이런 불행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헤어진 초반에는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정하던 것에 도출된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단호한 거절의 말투로 인해 포기했다. 최악이지만,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여러 여성분을 일부로 만났다. 그런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들이 성적으로서 매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상실했다. 그래서 아무리 예뻐도 성격이 좋아도 자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없었더라면 이라고 스스로 가정하며 망상을 시작했다.


망상은 끊임이 없었고 계속된 후회와 자기혐오만이 밀려올 뿐이었다.


자기혐오는 정신적으로 크게 타격이었다. 복용하는 약물이 늘었다. 원래도 좋지 않았던 정신건강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은 당연하지만, 불을 더 키웠다. 마음속의 불씨가 점점 커지고 번지기만 했다.


불은 어느새 나를 집어삼켰다. 그녀를 원망, 비난했다. 물론, 남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혼자만 삼켰고 뜨거운 불은 계속 나를 자극했다. 자극은 외부적으로 표출되었고 거의 안 좋은 선택으로 이어졌다.


사실 그녀가 그런 나를 바라봐주길 원했다. 너 때문에 망가졌다고 핑계를 돌리고 싶었다.


너만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암시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삶의 낙이자 오점이었다.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았기에 큰 책임이 따랐다.


큰 책임은 당연히도 큰 실수이기도 했고 그것은 큰 실망이 따라왔다.


다들 경험은 한 번쯤 해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애초에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경험을 해보지 않았으면 했다.


백해무익한 담배에 중독되는 것처럼 경험에 스며들었다. 스며든 나는 젖었고 물기를 짜도 습한 공기 때문에 마르지 않았다.


건조하지 않아서, 햇볕이 없어서 주변을 탓했다. 말이 주변이지 사실 그녀를 탓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굳이 해야 했으나 왜 하필 상대가 너였을까.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을 거다.


망상 회로는 끊임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행복하게 지냈다.


다른 사람과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 그녀는 나에게 보인 적 없던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없었던 모양처럼 말이다.


꽃밭에 너는 나를 기억하지 않았다. 없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나도 없던 존재로 치부해야겠다. 애초에 없던 일로 지정해야겠다.


그게 내가 살 길이었다. 그리고 살아가야 할 길이었다. 어떤 표정이든 네가 없는 것처럼 표현해야겠다.


그러면 진짜로 네가 내 인생에서 없어질 테니까. 사라진 기억이라는 말이 실제로 있을 테니까.


그래. 없었다. 너는 내 인생에서 경험한 적도 있었던 적도 곁에 머물렀던 적도 없다.


그러다 보면 내가 웃고 있는 표정을 지을 때 네가 기억나지 않겠다.


그런 불행의 탈피가 찾아오면 행복도 기쁨도 제자리로 돌아오겠다.


없었더라면, 아니 이제는 없을 너를 위하여 글을 쓴다. 키보드를 두들기며 하나씩 지워버리겠다.


그녀에게 내 인생을 맡겼던 과거의 나는 죽었다. 기억이 추억이 점차 사라지며 원래의 나를 되돌려 놓는다.


사랑하지 않았고 좋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없어진다. 이제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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