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아들 시점
구원받지 못했다. 기도해도 신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원망했고 서글펐다.
어쩌면, 삶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련과 고통 중 하나일 수도 있다.
그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좋은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했고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곳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사는 그런 누구나 꿈꾸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나는 가지지 못했다.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다른 나는 다른 부모님을 만들게 했다.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런 선택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나 때문에 고통받는 가족이 되었다. 신경 쓸 게 많아졌고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것조차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다. 슬픈 과정이 꼭 슬픈 결과를 내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도 그러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나게 맞게 조치했다.
얘기를 들어주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같이 가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살며시 곁에 기댈 수 있도록 했다.
솔직히 내가 그들이었으면, 나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련에서 벗어난 종류이기 때문이다.
자기 몸 하나조차도 건사하는 게 힘든 요즘만큼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다.
그 신경은 자신의 스트레스로 누적되거나 기쁨이라는 요소를 축소, 제거한다.
그런 환경이 됐을 수도 있었다. 만약에 노력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부정의 꼬리표를 달고 사는 내게 낙원을 보여준 것은 부모님이었다.
그 낙원에는 부정도 긍정도 존재하는 곳이었다. 부정은 쓰다듬어 긍정으로 만들고 원래 있던 긍정은 소중히 보관하는 곳이었다.
소중히 보관된 긍정은 나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잡다한 생각들을 비우고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으로 말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바꾼 건 내가 아닌, 부모님의 노력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피부가 맞닿을 정도로 느껴지면, 살아있음을 생각한다.
삶은 이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이 아니다. 그저 하나뿐인 단 한 번의 삶이다.
어떻게 해야 즐겁게 살아갈지 행복하게 살아갈지를 고민해 보게 된 것이다.
이제 누구에게나라는 말은 지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하고는 틀린 게 아닌 다른 거니까.
그리고 그 다름은 특별하다고 믿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가족이고 모임 그 자체다.
이제는 불행이 행복으로 서서히 바뀔 차례가 오는 것 같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똑같지 않기에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그 인생의 다름은 경험의 차이이고 자아의 존재 이유이다.
과거를 청산한다고 해보자, 과거에 묶여 현실에서의 힘듦을 강조시킬 필요는 없다.
부모님은 힘듦을 같이 들어주었다. 무거운 삶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노력했다.
그 속에서 점점 떨어지는 무게를 느꼈다. 삶을 가볍게 대하고 가볍게 스치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남들과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접어버리고 이제 나를 찾아보는 중이다.
아직 어떤 나가 될지는 모르지만, 찾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우리 가족은 이제 행복한 과정만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걸 쫓으라는 말은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그것만을 추구하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같이 탁자에 앉아 식사하고 사담을 나누며 오늘 있었던 일들에 관해 떠드는 그런 순간도 좋지만, 위로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며 불행을 덜어내는 순간.
그런 순간이 하나하나 다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불행에 잠식되어 중요한 것을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질릴 때까지 그들 앞에서 말해야겠다. 이제는 그만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말이다.
이제 나는 나의 낙원에서 그리고 그 낙원을 가꿔준 부모님에게 가봐야겠다.
오늘도 나는 그들 덕분에 행복함을 느낀다. 나의 낙원은 지금 여기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창문 너머로 어떤 풍경이 펼쳐지든 말이다.
이제 우리의 방향을 정해서 가는 일만 남았다. 꼭 큰 목적지가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같이 손을 잡고 걷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