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는 수 없이

가느다란 사랑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by 집안의 불청객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너는 쏜살같이 추격했다. 잠깐의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계속해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제는 뒤로 갈 수가 없었다. 절벽 끝에 몰렸기에 그녀가 물러날 줄도 알아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뒤로 가라고 암시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로 했다. 이 관계의 종점을 찍어야 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며 눈을 감았지만, 그녀가 이 모습조차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이 만신창이였다. 무서웠던 건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게 그녀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을 치게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뒤로 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이제는 정말 뒤로 갈 수가 없었다. 큰 바위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녀가 말했다.

“변했어.”


난 변하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뿐이다. 그녀가 그제야 발걸음을 뺐다. 그런데 한 발짝 물러서는 게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고 하는 수 없이 상처만 남은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과연 연애에 있어서 능동적이었는가. 아니면 수동적이었는가. 둘 다 성립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동적이었지만, 이행하는 데는 능동적이었으니까.


한 발짝 물러서는 건 움직였다는 것과 동시에 받아들임을 나타냈다.


하는 수 없이 양보해야 했고 하는 수 없이 추락해야 했으며 하는 수 없이 이별해야 했다.


왜 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했는가. 곰곰이 생각해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에 답이라는 건 없었다.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 애초부터 싹을 잘라놔야 다음번에 자라지 못하는 듯이 연애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말이 있다. 책 한 권도 안 읽은 사람보다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무섭다.


내가 후자의 경우였다. 첫 번째의 경험이 두려움으로 머리에 각인되어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독이 든 성배. 연애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이다. 겉은 번지르르하고 누구나 하고 싶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자아를 해쳐버리는 짓이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나의 사랑은 보통의 사랑과는 달랐다는 걸.


그렇지만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모든 걸 다 줘야 한다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바닥나면 끝이라는 느낌. 그런 느낌은 감정이 되고 감정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게 제일 공포였다. 인간관계의 지속된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설령 아문다고 해도 큰 흉터로 자리 잡는다.

상처는 누군가 건드리면 바로 아픔을 드러내고 흉터는 숨기느라 급급하다.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덮을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관리해야 한다. 고문과 다를 바 없다.


한 번이라도 관리에 소홀하게 된다면 남들의 먹잇감이 될 테니까. 내가 을이 될 테니까. 또 다른 상처와 흉터를 만들게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친구가 내게 말했다. 상처는 무섭고 흉터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지만, 그것을 보살펴주고 가려주는 사람도 있다고.


실제로 그 친구는 그런 연애를 하고 있었다. 도망과 추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먼저 한 걸음 물러설 줄 알았고 재촉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그 걸음에 맞추었다.


마치 다른 세계를 본 것 같았다. 문제는 그의 연애가 너무 이상적이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웠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친구의 계속된 위로와 상담 덕에 일부분은 극복했다. 연애를 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그녀와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연애라는 게 흉터와 상처 중에서 마약처럼 잠깐의 도파민을 느끼고 다시 점점 지쳐가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흉터와 상처를 보듬어주고 지쳐가는 삶의 낙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런 연애를 찾아가 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깊이 고민해야 봐야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기보다 사랑해 주는 사람과 연애해야겠다.


떨어지는 마음을 다시 울려야겠다. 우물 깊이 잠긴 감정을 꺼내봐야겠다. 마음속 한구석에 숨겨놓기만 했던 상처와 흉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겠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가니까. 뒤로만 물러서기에는 지금이 제일 젊은 시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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