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거절

가느다란 사랑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by 집안의 불청객

무수한 요구 그리고 그에 빗발치는 수락들.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내게 복권 당첨과도 같았다. 그녀가 정해놓은 정당한 사유에서만 거절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몸이 너무 아프다든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집안 내의 경조사가 발생하던지 말이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면 그냥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거절의 경우에는 더욱. 입력된 값에 따라 출력만 하는 프린트가 되면 그녀는 좋아했다.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걸 정의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알 수 없었다. 기계같이 차가운 심장에도 피가 아닌 전기가 흘러도 좋아만 한다면 과연 그것도 사랑일까.


친구들에게 이런 문제를 토로했다. 그들은 거절의 시도를 하라는 것이 아닌 헤어지라고 말했다. 오래 사귀었는데 서로가 바뀌지 않는다면 빨리 끝낼수록 좋다고 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목구멍에서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사소한 것도 거절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후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다 거절을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을 거절했다.


메신저 때문에 계속 울렸고 핸드폰을 들고 너무 피곤해서 자고 나서 전화를 하자고 했다.


나의 피곤함과 노고를 이해하기보다 그녀는 자신의 지루함을 덜어내는 게 더 필요했다. 그녀에겐 말 잘 듣는 인형이 있어야 했다. 자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실망감이 심장 깊숙이 박혔다. 머리에서는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말 잘 듣는 인형이 아닌 하나의 개체로서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의견 충돌이 생겼다. 문제는 해결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크게 싸운 적이 거의 없었고 거절하지 않는 내가 있었기에 의견 충돌도 잦지 않았다.


그래서 해결할 줄 몰랐다. 그녀는 내가 변했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기계가 아닌 나도 사람이라고 해주는 증거였다.


수락과 거절의 반복은 서로를 지치게 했다. 이제는 충돌하면 한쪽이 그냥 부서져 버렸다. 그 부서진 조각들은 둘 다에게 조금씩 박혔다.


박힌 조각들을 뺄 틈새도 없었다. 그렇기에 균열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고 우리는 갈라졌다. 마음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못했다.


둘 중 한 명이 놓으면 완전히 끝나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육 년을 함께했기에 물리적으로도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가 손을 놓자 나도 손을 놓았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 제안을 수락했다.


여태까지 했던 수많은 수락에 이어 수많은 거절을 하고 마지막 수락은 나를 찾아주는 과정이었다.


우린 서로 질려서 떠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맞지 않는 조각이었다. 깎는다고 보면 맞춰지겠지 싶었지만, 처음에는 내 돌만 깎아 억지로 맞추었고 그다음에는 그녀의 돌만 깎였다.


딱 맞는 조각이라는 건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와 헤어진 후 내가 아무 의미도 없고 무슨 존재인지 고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각에 맞는 사람을 찾기보다 스스로 정성스럽게 깎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하기 싫은 일을 구분 지었다. 누구에게도 제한받지 않고 말이다.


수락은 남들을 넓히게 해준다면 거절은 나를 넓히게 해준다. 뭐든지 수락하면 남들에게 평판은 좋지만, 자신을 잃어버린다.


가끔은 거절도 해야 한다. 나는 칩이 박혀 누가 정해놓은 대로만 움직이는 깡통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걸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이루면 행복도 느낀다.


그런데 아무 의미도 없는 수락은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인정이 따라올 수 있으나 그것은 언제나 남의 시선에 평생 묶여 있을 뿐이다.


내가 사귀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수락의 연속은 받지 못하는 사랑이다. 연인 관계에서 양쪽 다 사랑을 받아야 한다. 거절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 방어선이다. 뒤꽁무니만 쫓아가며 한쪽만 바라보지 말고 거절도 알아보자. 말해보자 ‘이건 싫어.’라고.

keyword
이전 10화10. 회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