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로암 Aug 23. 2024

직선을 감당하지 못할 자

그녀와 마주 보고 앉는다. 그녀는 수학문제를 푸는 과정을 지켜보고 마음을 분석해 주는 일을 한다. 직선을 감당하지 못할 자,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문구가 문 앞에 붙어있다. 그녀의 가게는 생계가 달린 일이 아니었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마음대로 운영된다. 그녀가 수학을 팔 때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회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했지만 은퇴 후 그녀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를 보세요. 식을 잘 세웠어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그런데 망설인 흔적이 보여요. 식이 맞는지 틀린 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죠. 그래서 식을 세워놓고 풀지는 않은 거예요. 식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당신을 막고 있어요.     


어릴 적 아빠의 부재라든가 엄마의 강요라든가 형제에 대한 열등감이라든가 그로 인한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든가 하는 상담에서 빠질 수 없는 과거로의 탐색인가. 수학이라는 매개체는 신선했지만 상담내용의 진부함에 조금 실망했다. 결국 같은 이야기잖아. 그녀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나요? 그렇다면 옳은 식과 풀이방법을 알려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내 것이지 당신 것이 아니에요. 당신 것이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내 것이에요. 그걸 알고 있어야 해요.      

-내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계속 생각해야죠. 그리고 손을 움직여야 합니다. 이 문제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글자하나 숫자하나를 다 뜯어내서 개별의미를 찾아내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전체적인 의미를 탐색해야 해요. 머리가 그러고 있을 동안 손으로는 식을 쓰고 계산을 하고 맞든 틀리든 일단 머리와 손이 함께 나가는 겁니다. 이걸 반복해야 해요. 당신은 머리는 움직이는데 손이 안 움직여요. 손을 움직이는 걸 거부하고 있어요. 망설이는 게 아니라 싫어하고 있어요.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것. 이유를 생각하지 않아야 리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리듬을 만드는 것이 어렵긴 해요. 시간도 좀 걸릴 거고 그렇게 얻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 조각의 사유일 뿐입니다. 하시겠어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당신은 틀렸어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게 아니에요. 틀렸어요.     

그녀는 내 눈의 중앙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내가 틀렸다고.     

-당신은 도망치고 회피하고 있어요. 자신의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요. 당신이 주변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 도망가고 더 괴롭혀요. 괴로운 당신은 틀린 사람입니다. 그저 쉬운 위로나 토닥임을 받기 위해 여길 예약한 거예요. 내가 경고했을 텐데요. 당신은 직선을 버틸 수 없잖아요?     


이 씨발년이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으시면 이 문제를 풀어보시겠어요?     

그녀는 내게 연필과 문제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큰 지우개도 스윽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쉬고 문제를 보았다. 내가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연필을 쥐고 식을 세우고 풀이과정을 깨끗하게 적어가며 문제를 풀었다. 지우개는 쓰지 않았다.     


-이건 고등학교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은 정규교육과정을 잘 밟아온 성실한 사람이라는 거죠. 당신은 성실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가진 그 사고력으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네요. 당신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계기로 도망을 가야 욕을 덜먹을까 이 생각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도망치지 못하게 할 수 없어요. 이미 그것은 당신 안에서 정해진 것이니까요. 저는 막을 생각 없습니다. 힘들거든요. 

 처음부터 문제 풀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정말 문제를 당신 것으로 만들고 싶나요? 당신은 문제를 풀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죠. 아닙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고개를 돌리는 사람입니다.       


틀려도 지랄 맞춰도 지랄인 그녀를 노려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가게의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거대컴퍼스를 천천히 들어서 컴퍼스의 중심을 그녀의 눈에 겨눴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말했다.      

-당신은 나를 찌를 수 없어요. 당신은 틀리고 도망치고 회피하는 사람이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니까. 단정하고 아름답게 시처럼 수식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를 해할 수 없어요. 상담은 여기까지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문제를 더 드릴까요? 다른 문제를 더 원하시면 비용은 추가됩니다.      


컴퍼스를 툭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비용은 얼만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