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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암 Aug 09. 2024

외로운 소수

약수의 정의는 나누어 떨어지게 하는 수이다. 나머지가 없다는 말이다. 딱 맞게 나누어 먹을 수 있다. 많은 예능에서 볼 수 있듯이 6명의 사람은 2명씩 세 팀이 될 수도 있고 3명씩 두 팀이 될 수도 있고 6명이 한 팀이 될 수도 있다. 1명씩 각개전투도 가능하다. 그래서 6의 배수도 약수가 많다. 실생활에 많이 쓰이기도 한다. 시계라든가 월이라든가 여러 곳에 6의 배수가 가득하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좋아한다. 약수가 많은 수는 다들 사이좋게 하하 호호 웃으며 함께 살아간다.   

  

 그에 비해 소수는 외롭다. 1과 자기 자신만을 약수로 가진다. 17이라든가 59 같은 수는 나눠먹을 수가 없다. 억지로 나눠먹으려고 하면 나머지가 생기고 나머지를 다시 정확하게 나누려면 분란이 생긴다. 17개의 사과를 3명이 나누어 먹으면 2개가 남는다. 그러면 남은 2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과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서 상처받는 사람이 생긴다. 더 가지더라도 그것이 과연 이익인지 알 수 없다. 흔쾌히 양보하는 이가 있어 분란 없이 2개의 사과를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흔쾌히 양보할 수 있는 이면을 더 살펴보면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지켜보면 과연 그것은 공정한 거래였는지 알 수 없다. 소수는 싸움의 시작이다.   

   

 남은 2개의 사과를 다시 정확하게 3개로 나누기를 선택했다면 그때부터 자연수는 갈라져 분수가 되어야 한다. 1보다 작은 수를 나타내기 위한 분수. 칼이 등장하여 사과를 쪼갠다. 2개의 사과를 각각 3 등분하면 6조각이 나온다. 그러면 3명에게 2조각씩 주면 딱 맞다. 그러나 분수의 등장은 어떤 이에게 굉장한 재앙이다. 넘을 수 없는 선을 밟았음을 직감한다. 사과를 똑같이 쪼개 사과조각개수를 헤아리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제일 슬픈 일은 나 빼고 모두 그것을 쉽게 하는 것이다.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분수를 이해하는데 나만 이해하지 못한다. 외롭고 슬프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다. 소수는 이렇게 누군가를 외롭게 만든다.      


 계산과정에서, 특히 분수의 연산에서 소수가 등장하면 욕을 한다. 약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통분을 하려 해도 숫자가 커진다. 계산은 길고 복잡해진다. 내가 맞게 풀고 있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길고 긴 계산을 하면 뇌는 화를 낸다. 소수는 이렇게 사람을 거칠게 만든다.      

소수라는 것은 늘 이렇게 외롭고 상대방을 거칠게 만든다.      


 싸울 수밖에 없는 소수를 생각해 본다. 명절에 시댁식구들에 둘러싸인 며느리라든가 비장애인들 사이를 엎드려 기어가는 장애인이라든가 동성을 사랑하는 성소수자라든가. 그들의 공통점은 외롭고 상대방을 거칠게 만든다는 것이다. 너만 참으면 될 일인데 왜 참지 않아서 평화를 깨는 거냐. 네가 잘못한 거다. 거칠어진 다수는 소수를 향해 분노와 욕설과 모욕과 혐오를 쏟아내고도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에 의기양양하다. 당연한 일은 그 일로 이익을 보는 자만이 당연하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당연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다수의 인간들은 자신이 소수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소수가 참지 않고 싸우려 드는 순간 소수를 손가락으로 찌르기 시작한다. 소수는 외롭다. 자신의 외로움을 나누기도 쉽지 않아서 외롭다.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싸울 수도 없다. 싸우든 안 싸우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존엄성이라든가 이동권이라든가 평화라든가 삶이라든가.        

   

 약수를 잔뜩 가진 이들이 평화롭게 무언가를 나눠먹는 동안에 소수는 외롭게 비난을 견디고 있다.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음에도 분노와 욕설과 모욕과 혐오를 받아내고 있다.  약수를 잔뜩 가지는 때도 있고 외롭게 소수의 싸움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 당연하게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하고 당연하게 나를 비난하는 누군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입장에 있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다.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절망을 느낀 적도 있고 이윽고 이해가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발디딘 적도 있다.      


36개의 사과는 1명. 2명. 3명. 4명. 6명. 9명. 12명. 18명. 36명과 나누어 먹을 수 있다. 

37개의 사과는 1명 또는 37명과 나누어 먹을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자연수이지만 가는 길이 너무나 다르다.     

36은 37에 대해서 기세등등하지 않고 37은 36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숫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 이런 수의 절대적인 객관성을 좋아하고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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