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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영어학원

by 파로암

사교육계의 투탑 영어와 수학


영어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은 확연히 다르다. 특히 머리카락의 색깔이 다르다.

예전에 속했던 사무실에서 영어선생님들을 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학과 영어가 섞이는 일은 드물었는데 각 과목의 모임에 지각하거나 결석한 선생님들을 따로 모아서 회의내용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수학선생님은 나밖에 없었다. 영어선생님들이 출결에 느슨한 편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검은 머리가 나밖에 없었다. 영어선생님들의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 붉은 갈색 푸르뎅뎅한 갈색 핑크물 빠진 회색이었다. 단 한 명도 까맣지 않았다. 옷색깔도 확실히 화려했다. 수학선생님들 모임은 어둑어둑한 무채색인데 영어선생님들은 마치 베네통.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이 부딪히는 이유는 대부분 시간이다.

사교육의 기본이 영어와 수학이므로 수업시간이 겹치거나 늦게 마치거나 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트러블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들 배운 사람들이기도 하고 서로의 상황을 잘 이해하므로 학생들을 통해 정중하고 우아하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해결한다. 뒷담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 크진 않은지 잘 들리지 않는다.


가끔 내 수업을 마치고 영어학원으로 가는 아이들에게 커피한봉이라든가 견과류 한 봉지 같은 것을 들려 영어선생님에게 보낸다. 이 아이를 가르치느라 수고하십니다. 저도 얘 때문에 수고하거든요.라는 메시지를 담아 보낸다. 그러면 홍삼 한 봉지가 돌아오기도 한다. 얼굴을 본 적도 대화를 한 적도 없는 다정한 이웃이 있다.


내 자식의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원장님은 이벤트를 잘하시는데 퀄리티가 꽤 좋다. 세밀한 곳까지 신경을 많이 쓰고 돈도 많이 쓴다. 아이들에게 투자하겠다는 의지가 일렁일렁 보인다. 원장님은 올해 원생들에게 책을 빌려주기로 하셨다며 매달 대량의 책을 구입하여 아이들과 읽겠다고 하셨다. 나는 내 책장을 둘러보고 신간과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책 스무 권 정도를 골라내어 분홍색 보자기에 쌌다. 책보따리를 학원현관 앞에 배달했다. 좋은 일 하십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쓴 쪽지를 붙여두었다.


몇 달 후 나의 자식이 학원에서 돌아와 주섬주섬 가방에서 뭘 꺼냈다.

00 학원의 신사분께서 보내셨습니다. 라면서

책이었다. 나는 기뻤다. 이런 교류가 흐뭇했다. 책을 주고받는 사이라니. 지적허영심도 좀 채워지는 것 같고.


나는 혼자 일하니까 외로운지도 모르고 외롭다.

가끔 이런 동료라고 하기엔 너무 먼 동종업계사람에게서 먼 길 헤쳐온 따뜻한 시그널을 받을 때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같이 일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직업의 영역에서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는 것은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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