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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지 못해 미안해.

by 정수TV

나도 여느 남자들처럼 꼼꼼하지 못하다. 그래서일까 행정적인 실수를 가끔 저지른다. 큰 실수는 아니고 날짜를 빠뜨린다던가, 공문에 붙임문서를 첨부안 한다던가 등 지금은 많이 좋아져 공문처리를 할 때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이 길러졌다. 문제는 누구나 그렇듯 새로운 일을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기존에 했던 공문이나 일들은 쉽게 처리하는데 왠지 새로운 일은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과감하게 할 수가 없다.

1년 전쯤 교과연구회를 만들어 운영해보라는 주위의 추천을 받아 만들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상 만들기를 주제로 만들다 보니 회원 모집도 쉬웠고 운영도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문제는 예산 쪽이었다. 3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받아 운영하다 보니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항상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선배 선생님들께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이 "그거? 대충 해도 돼, 누가 검사하지도 않아", "아~ 그런가요?" 나는 반신반의하며 그래도 지출 규칙에 맞게 한 푼도 남김없이 회원들에게 모두 썼다.
때는 12월 한참 성적처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한통의 전화가 교실로 왔다. 요즘은 교실도 번호가 있어 외부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대이다. 나는 아직도 이게 낯설다. 항상 교무실에서 연결해서 받았는데 지금은 아예 나의 교실에 바로 전화가 직접 왔다. 번호를 보니 교육청 번호로 보였다. 정산 관련 담당자로 한참 전화한 이유를 들어보니 내가 얼마 전에 정산했던 그 교육연구회의 지출 문제였다. '오, 분명 대충 할 거고 아예 보지도 않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심히 당황했다. 교육청 담당자가 한참을 나의 행정 실수를 여럿 얘기하는데 세 번째 부분에서 이거 안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죄송한데요, 요즘 성적처리로 바쁜데 정산은 이미 규정에 맞게 잘 처리하였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나의 행정 실수를 이야기하였고 다시 공문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하신 부분을 고쳐 제출할게요"

나는 심히 마음이 상했다. 그리 크게 잘못된 부분이 없는데 날짜가 맞지 않다느니, 공문 번호가 기입 안되었다느니, 엑셀 표가 잘못되었다느니 등 예산을 잘못 지출했다는 전화가 아니라 그냥 행정적인 부분이 잘못되어 다시 제출해달라는 것이다. 그래도 교육청 이야기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자료를 찾아 틀린 부분을 여러 번 수정하고 다시 제출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1년간 교육연구회를 운영하는 것도 사실 녹녹지 않았는데 이런 행정적인 부분까지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계속 자료를 요구하면 누가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속에서 열이 났다. 마지막으로 공문을 제출하고서 오후에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동안 서운한 마음을 얼굴도 모르는 담당자에게 이야기했다. 분명 주위에서 정산 부분은 쉽게 할 것이니 걱정 말고 지출하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세게 하냐?부터 1년간 교육연구회를 이끌어가면서 회원들에게 협조가 안된 이야기, 나중에 영상 발표를 준비하면서 밤마다 회원들의 영상을 혼자 편집한 이야기 등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 담당자에게 나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났는데 생각해보니 내년에 교육연구회를 계속할 것인가를 결정을 해야 했다. 이번에는 교육청 교육연구회 담당자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안 사실인데 정산 담당자 따로 있고 운영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이번에는 운영 담당자와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얼마나 하소연을 많이 했으면 나도 내가 목이 쉬고 잠긴 것을 깨달았다. 담당자는 나에게 "선생님 너무 힘들어 보여요. 선생님 결정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는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말을 해줬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몇 년 전 가까운 사람과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사실 그 이후로 서먹했고 그때 내가 "네가 하는 거 봐서 나도 할 거야!"라고 날 선 말을 했던 생각이 났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잘하고 박하게 굴면 나도 박하게 굴었다. 그랬더니 사이가 좋아지기는 커녕 맨날 사소한 일에도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기 바빴다. 아마 대부분의 성인들이 겪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의 결정대로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또 잘 알지도 모르는 담당자에게 듣고 나니 집에 오는 길에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에 따라 내가 행동한다고 말을 했지만 그건 상대방을 인정하는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말이 아닌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처음부터 그 사람을 인정하고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가 문제지 나의 마음은 이미 지난 일을 항상 생각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이 들자 이번 행정적인 문제가 왜 나에게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행동과 말이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남이 아닌 바로 나의 순수한 결정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 항상 나의 의견은 묻지도 않으시고 결정하셨다. 그래서 당연히 아이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몸으로 체득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심히 당혹스러운 일이 많았다. 한참을 화를 내거나 혼내고 나서 이유를 물어보면 내가 틀린 것이다. 미안하다고 얘기도 이미 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니?"라고 먼저 묻는다. 그 이유를 들어보고 타당하면 넘어가고 그렇지 않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칙을 주었다. 어린 시절 나의 의견은 항상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생각 들었고 교사가 되어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나의 의견을 개진했다가 누군가 반대하면 바로 철회하고 그쪽 의견을 따랐다. 나의 의견의 소중함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 보니 나의 의견은 종이조각에 불과한 게 아니었고 이 가정과 같이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즉,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소중한 것이었다. 난 비록 어린 시절 나의 의견이 소중히 여겨지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는 나의 결정의 중함을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 일을 겪으면서 터득한 소중한 가치이다. 여러분도 혹시 상대방의 말과 행동으로 어렵지 않으신가요?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아닌 나의 마음속 내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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