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이 Feb 17. 2022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지금에야 그런 것이 없어졌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놀토'라는 게 있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대부분 알 테지만,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격주에 한 번씩은 토요일에 학교를 나가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 '놀토'보다도 학교에 가는 토요일을 유독 좋아했다. 4교시를 마치고 12시에 집에 돌아오는 길이, 아직까지도 설레는 기억으로 남아있을 만큼, 말이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엄마는 거실 창을 전부 열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소파를 이리저리 옮기고, 책장을 이리저리 옮기고, 나는 이제 와서야 그게 엄마가 가진 하나의 취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세 남매를 키우며 엄마가 가져왔던 유일한 취미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고, 새가 여럿 지저귀고, 엄마의 분주한 모습 뒤로 널려진 가구들이 보이는 토요일의 12시. 그 풍경은 다른 어떤 말로도 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안락하고 따뜻한 순간이었다.


"어, 왔어?"


아직은 30대였던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집안 곳곳에 풍기는 맛있는 냄새. 그것은 때때로 고구마이기도 했고, 샌드위치이기도 했으며, 김치찌개이기도 했고, 줄줄이소세지이기도 했다. 나는 가방을 거실 한편에 내려두고, 엄마에게 다가간다.


"또 뭘 정리해?"


그럼 엄마는 항상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도 지저분해서."




엄마가 잠시 거실 정리를 멈추고, 부엌으로 와 나의 밥을 챙겨준다. 탁자 위에 놓인 여러 가지의 반찬과 밥그릇 가득 찬 밥. 나는 엄마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그리고 학교에서 있었던 별 것 아닌 얘기들을,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인양 엄마에게 풀어놓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한 재미도 없었을 텐데, 엄마는 내 눈을 마주치고 웃으면서,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곤 했다. 그렇게 한창 밥을 먹고 있다 보면, 뒤이어 동생들이 뛰어들어온다. 분명 나랑 같이 끝났을 텐데, 동생들은 친구와 놀고 온다는 이유로 언제나 조금씩 늦곤 했다. 땡볕에서 노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동생들의 땀을 닦아주며, 엄마가 그들 앞에도 밥을 놓아준다. 우리는 모두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한 달에 두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 토요일 12시의 풍경이었다.


오후 2-3시쯤이 되면, 아빠가 집에 들어왔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농사를 돕는 일 때문에 주말마다 늘 바빴다. 까맣게 그을린 아빠의 얼굴 위로 땀이 송골송골하게 고인 것이 보인다. 엄마는 거실의 뒷정리를 마치며, 아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은 농사가 어땠네, 날씨가 어땠네, 애들이 학교에서 어땠네, 하면서. 잠시 후, 아빠가 씻는 욕실의 물소리를 들릴 때쯤, 우리는 셋이 나란히 모여 앉아 애니메이션을 봤다. 그때의 우리는 '파워레인저'를 자주 보곤 했는데, 우리는 항상 그걸 볼 때면 장난감 칼로 싸우는 시늉을 하곤 했다. 집에 다른 장난감보다 장난감 칼이 많았던 건 아마 그 영향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한가한 토요일의 오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동생들과 가만히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 있어도, 꽤나 많이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나는 가끔 할 일이 많아서, 너무 지쳐버려서, 우울해질 때쯤이면 가만히 눈을 감고 그때의 일을 생각한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뛰어갔던 순간과,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던 순간, 배가 다 꺼지기도 전에 동생들과 나란히 앉아서 파워레인저 같은 애니메이션을 봤던 순간들에 대해서.


이따금씩 영화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본다. 누군가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누군가는 지금 곁에 없는 사람을 한 번 더 다시 보기 위해, 누군가는 그저 순간의 실수로 인해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과거의 선택이 현재를 더 낫게 만들기도, 현재를 더 나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다. 나에게 지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나는 다시금 그때로 돌아가게 될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가지 않는 편을 택하지 않을까 싶다.




"아름다운 기억은,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놔두는 게 좋은 거야."

분명 그 시절의 나에게도 제 나름대로의 아픔과 고민이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을 아름답게만 추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을 전부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기억을 아름답게만 간직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멀리서 지켜보는 게 때때로 더 좋을 때가 있다.


2022년 2월 17일이 지나고, 그 뒤로 몇 년이 흐르고 나면,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내가 가진 아픔을 전부 잊게 될까.  그리고 지금의 내가 2010년의 나를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는 것처럼, 2022년의 나를 아름답게만 추억하게 될까.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들에,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내일의 햇살을 맞이할 테다.





 <교차로입니다 서행하세요>의 열세 번째 글입니다. 이 매거진은 같지만 다른 점이 많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글을 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은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