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의 일기
내겐 남동생이 둘 있다. 그리고 아들도 둘이다.
남자들과 함께 성장한 경험은 아들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요즘 한창 나의 어릴 적 일기를 읽어보는 중이다. 그러다 결이 다른 한 권을 발견했다. '뭔가 다른데? 이상하다?' 하고 앞표지로 넘겨보니 첫째 동생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휘릭 넘겨보던 중 '권투'라는 제목의 일기를 읽고는 푹 하고 웃었다. 1989년 2월의 일기 속 형제. 지금 내 옆 아들들의 모습과 어쩜 이리도 똑같은지. 너무나 유치해 어이가 없으면서 한편으론 위안이 된다. 지금 이래도(?) 멀쩡히 자라겠구나, 외삼촌들처럼.
1989년 2월 4일 토요일
주제: 권투
권투를 하였다.
나(첫째동생)와 OO(막내동생)랑 권투를 하였다. 난 열라게 때렸다. 그러자 OO가 열라게 때렸다. 나는 이제 도망갔다. OO는 날 따라왔다. OO가 오자 열라게 때리고 도망갔다. 도망가고 때리고 참 힘들었다. 우리 둘은 지쳤다. 그러나 OO는 단념하지 않았다. 난 열라게 뛰어가서 때렸다.
계속하였으나 우리는 완전히 픽 쓰러졌다.
참 즐거운 하루이다.
소년의 세계
아, 소년의 세계란... 참으로 유치하다.
지금 초6, 초4의 아들들도 딱 저리 논다.
첫째가 둘째를 약 올린다.
그러자 둘째가 형에게 달려든다.
첫째는 이제 도망간다. 둘째가 첫째를 따라간다.
둘은 도망가며 때리고 열라게 뛰고 또 때린다.
계속하였으나 그들은 완전히 픽 쓰러졌다.
형제는 참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둘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서로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서로 약 올리고 때리고 도망가며 신나게 시간을 보낸다. 물고 할퀴며 함께 뒹구는 호랑이 새끼들과 진배없다.
"좀 떨어져 있어."
"둘 다 아무 말 하지마!"
아무리 소리치고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 5분을 못 넘긴다. 남편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남편도 아가씨도 모두 둥글둥글 유순한 성격이다. 친구뿐 아니라 동생과도 이렇게 싸우거나 놀아본 적이 없단다. 그런 남편에게 아들들은 종종 나잇값 못하는 녀석들로 비친다. 나 역시 남동생들이 없었다면, 자매만 있었다면 이런 아들들을 이해 못 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보았을 것이다. 1989년에도, 2021년에도 소년들의 세계는 참으로 거칠고 유치하다.
반전의 매력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 다르듯, 세상이 예측불허 하듯. 거칠고 단순한 야생동물 같은 소년에게 반전의 매력이 있었으니... 동생과 몸으로 죽자 사자 싸우며 노는 꼬맹이의 일기 속에서 '기쁨과 슬픔'이라는 단어가 나를 붙잡는다. 대체 넌 누구냐. 그리도 유치하면서 이토록 성숙한 열한 살이라니. 소년의 머리와 가슴 속엔 자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철학이 담겨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뜻을 이루면 기쁘다.
각각 자신의 기쁨은 다르다.
여러 가지 기쁨을 만나보자.
남동생은 나와 달랐다. 부모를 만족시키는 데서 기쁨을 찾았던 열한 살 소녀와 달리, 열한 살의 소년은 자신만의 기쁨을 찾으려 고민하고 있었다. 기특하고 영특하다. 첫째 동생은 어릴 때부터 나의 글이 좋다고 말했다. 글쓰기 숙제할 때면 누나의 글을 베껴갔다 했다. 하지만 나는 동생의 글이 훨씬 좋아졌다. 이 보석 같은 글들을 왜 이제야 보았을까? 동생의 다른 일기들은 어디 두었지? 다음에 친정에 가면 보물찾기 하듯 동생의 일기를 찾아봐야겠다.
인간의 자기실현에 대해 연구했던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에게 즐거운 경험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경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개 인정받는 경험을 택한다. 그리고 자기의 기쁜 감정을 죽이거나 외면한다. 아이에게 주위 사람의 관심을 잃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남모르는 깊은 상처를 안고 인생을 시작한다.
-가토 다이조 <착한 아이의 비극>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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