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 실타래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기차를 탈 일 없이 인천공항에서 타이중 공항으로 직접 왔으면 편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게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출장을 계획하기 바로 직전! MBC '나 혼자 산다'에서 타이중편이 방영되는 바람에 직항 표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나 뭐라나.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타오위안 공항을 들러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동료와 이야기 꽃이 한창 일 때 창 밖 멀리 보이는 커다란 산을 중심으로 물이 가득한 논이 딸린 마을 몇 개를 지나자 평지에 세워진 회백색 도시가 나타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과천과 분당 그 중간 어디쯤 같았다. 대만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타이중이었다. 타이중역은 생각보다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건축물 규모만 봤을 때는 광명역과 견줄만했지만, 조금은 휑한 광명역보다 훨씬 정리가 잘 되어있었고 이용하는 승객이 많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 앞에는 회사가 다른 듯 옷차림이 다른 두 명의 기사님이 있었는데, 서로 본인에게 오라고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호갱(?)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리가 누군가! 소식적 폰팔이와 용팔이에게 몇 번이나 호갱을 당했던 호구(?)들이 아니던가. 여하튼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눈이 마주친 오른쪽 기사님을 선택했다. 숙소는 '나 혼자 산다'에 나왔던 펑지아 야시장 근처에 있는 호텔이었다. 숙소 근처에 진입하자 도로엔 스쿠터가 즐비했다. 약간 시큼하면서도 취두부의 꾸릿한 냄새도 풍겼다. 그런데 숙소 바로 앞 사거리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지고 택시가 스쿠터 몇 대와 나란히 멈춰 섰을 때, 나는 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 느낌은 분명 오늘 새벽 잠결에 알람을 모두 끄고 늦게 일어났을 때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어? 왜 내가 아무것도 매고 있지 않은 거지? 설마... 제발 아닐 거야...'. 그렇다. 기차에 가방을 놓고 내린 것이다. 선반 위에 올려놨던 바로 그 검은색 백팩! 으악! 또? 또? 이렇게 실수를 한다고? 또?! 그것도 숙소를 100m 앞에 두고 이제야 알아차린다고? 내가 제정신인가? 새벽의 액땜으로 꼬였던 운명의 실타래가 풀린 줄 알았건만, 꼬일 대로 꼬인 운명의 실타래는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하실 밑에 지하실은 건재했다.
현지시간으로 3시. 숙소에 체크인이 시작되는 시간. 호텔에 도착한 나와 동료는 머리를 맞댔다. '어찌하면 좋소?'. '죽으면 되는 것이다'. 아니 그거 말고. 분실신고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대만어를 하지 못하는 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체크인도 못하고 호텔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동료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호텔 프런트에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어?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우리는 곧장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프런트 직원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직원에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제 막 슬슬 업무를 시작하려던 차에 난입한 외국인 한 명 때문에 프런트에 있던 직원들은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객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않겠나 싶으면서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몇 차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내게 말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차, 그걸 설명 안 했구나' 나는 기차표를 건네며, 자리 위의 선반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잠시 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끊은 직원이 내게 말했다. '가방을 찾았답니다. 그런데 아직 열차가 종점에 도착을 안 해서, 가오슝에 도착하면 정확하게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아요. 확인하는 대로 호텔로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연락이 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제멋대로 가방을 잃어버려 놓고는 싼 똥을 치워달라고 하는 꼴이라니.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싫고, 받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 탓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주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처리해 버릇하는 내게는 정말이지 자괴감이 들 정도로 싫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두 발 뻗고 잠은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가방의 위치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한숨 돌린 나와 동료는 내일 있을 업무 이야기도 할 겸 근처에 있는 일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러모로 많은 일을 겪은 터라 둘 다 진이 빠진 상태였다. 뭐 물론, 맥주 한잔 걸치니 바로 사라지긴 했지만 아무튼. 펑지아 야시장을 간단히 돌고 - 그렇게 크지 않아서 금방 돌았다 - 호텔로 복귀하니 아까 프런트 직원이 나를 찾았다. 아까 건네준 기차표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에 어떤 넘버가 적혀있었다. '가방은 가오슝 역에 있어요. 가방을 찾으려면 가오슝 역으로 가서 넘버와 여권을 보여주면 될 거예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지만 업무 때문에 일정상 가오슝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가 내일모레 타이중역에서 타이베이로 가는데, 가방을 타이중역에서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찾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었다. '요청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5일에서 7일 정도 걸릴 거예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이 일의 운명 역시 나의 손을 떠났다. 내게 남은 건 HSR 측의 판단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오슝으로 가고 싶었지만,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에 무얼 어쩌겠는가. 그래도 한 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건 내가 꽤 운이 좋은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내가 얻은 대부분의 것들은 운이 좋아서였다. 바로 전날 기출문제집에서 봤던 문제가 시험에 그대로 나왔다거나, 나보다 점수가 높은 누군가 공채 입사를 포기하면서 추가로 합격했다거나. 그리고 오늘도 비록 늦게 일어났지만 비행기를 놓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운이 좋긴 했다. 제발! 비록 신을 믿지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도밖에 없었다. 2024년 초부터 기도메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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