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꿈 6
나는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한동안 누군가에게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글을 쓰는 내내 한 번도 내 글을 읽을 독자를 헤아려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라 해도 누군가에게 보여 줄 생각으로 글을 썼다면, 이때껏 한 번도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내 생각과 내면을 그토록 솔직하고 세세히 (어쩌면 무방비하게) 드러내진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을 위한 글이었고, 쓰는 이유가 그러하기에 글이 완성되기 전 단지 쓰는 행위만으로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내 글의 독자로 특정하지 않았기에 (장르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내 글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보이기에 부족한 면이 있었다.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선보이기 참으로 애매한 글이라서 정규 출판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고, 언젠가를 그리며 자가출판에 대한 생각을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가출판 또한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내가 소장하고 싶은 글을 종이책으로 갖고 싶었지 당장 내 마음에도 차지 않는 글을 단지 첫 글이라는 이유로 소장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글을 완성하고 난 후,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물이 고작 이거라는데 심한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었다. 낙심이 커서 완성의 기쁨조차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던 글을 퇴고를 위해 다시 읽었을 때 그래도 이 정도면 노력했다 조금은 나를 인정하게 됐고, 앞으로는 차근차근 다른 글을 여럿 써보며 더 나아질 여지가 많은 서투른 내 글을 마음에 드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데 집중할 계획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사람 마음이 이상하게도 또 한 번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자, 이 글을 나만 간직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나를 위한 글을 썼기에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으나, 진정 나를 위하자면 이 글은 누군가에게 읽혀야 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래, 글의 운명이란 본디 그런 것이었다.
그동안 (나조차 이해 못 할) 극강의 조심스러움으로 한 번도 꺼내지 못하고 내부에서만 맴돌았던 이야기를 이제 와 대책 없이 밖으로 내보일 자신은 없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연유와도 맞닿아 있었으니, 쉽게 드러낼 수 있었다면 나도 진작에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말하지 못해 힘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이리 사장되고 마는가 싶었으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에게 말하지 못할 내밀하고도 비밀스러운 글이라면, 나를 모르는 이에게 보이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내가 독자로 활동했던 장르소설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넷상에서 보통 그렇듯 장르소설 사이트에서 나는 본명이 아닌 닉네임으로 활동했는데, 그럼에도 뭐가 그리 겁이 나는지 내 닉네임조차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글을 올렸었다.
글을 올리고 나서는 언제 고민했나 싶게 누가 얼마나 어떻게 내 글을 읽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는데, 이토록 빠른 태세 전환이 조금 낯 뜨겁게 다가왔다. 시간을 끈 게 무색하게 조회 수를 신경 쓰고, 새로운 댓글이 달렸나 확인하느라 때마다 잊지 않고 새로 고침을 눌렀다. 지치지도 않고 하루에 몇 번을 계속 들락날락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사람들의 반응에 온 관심이 쏠려있었다. 악플은 없어져야 하지만, 어쨌든 관심의 일종이지 않나 뜻하지 않게 체감하며 애달피 기다렸다. 뭐가 되더라도 좋으니 내 글에 대한 반응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설혹 글이 지루하다는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내 글을 읽으며 나도 지루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러지 않고자 노력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싶어 그리 가혹한 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추어에게 너그러운 장르소설 독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힐 자신조차 없는 소심한 초보 작가에게 그리 매몰차게 굴지 않으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믿을만한 안전망을 깔아 둔 나는 내심 긍정적인 피드백을 기다렸다.
댓글이 달렸다. 게시글마다 고작 두세 개로 내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많이 달리지 않았는데, 그나마 내 꼼수가 통한 결과였다. 실은 댓글을 많이 받고 싶은 마음에 잔머리를 굴려 하나의 글을 4개의 분량으로 쪼개어 업로드했었다. 게시글의 수가 늘어난 만큼 댓글이 많이 달리는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 내 첫 글의 경우, 글을 쓰기 전에 고려하지 않았던 기승전결이 다행히 글을 완성할 즈음에 저절로 구분되어 이런 꼼수를 적용하기 용이했다.
글을 네 부분으로 쪼개 파트를 나눈 후, 일부러 띄엄띄엄 시차를 두고 올렸다. 독자 몇은 내 의도대로 게시글마다 하나씩 댓글을 다 따로 달았다. 1개 받을 것을 4개나 받아낸 내 선견지명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댓글을 꼼꼼히 확인했다. (4개로 쪼개서 올리지 않고, 완성본 통으로 올렸으면 댓글을 더 적게 받았으리라)
내 글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어느 동네나 그렇듯 아마추어 장르소설계 또한 이름값의 영향이 적지 않았는데, 첫 글인 데다가 익명으로 올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댓글 내용도 당시 나에겐 썩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댓글에 감사하지 못할망정) 내심 찬양 일색의 반응만을 내가 기다렸다는 것을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루아침에 장르소설계의 톱스타로 부상하지 않는 이상에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들인 품이 너무 커서 인풋에 걸맞은 아웃풋이 나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번 기회에 너무 큰 인풋의 결과는 결코 만족에 다다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야심 차게 글을 내보인 것에 비해 눈에 띄는 성과도 만족스러운 반응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내 글을 읽는 타인을 인지하고 서야 비로소 나는 내 글이 진정으로 완결 지어졌음을 알았다.
그동안 대쪽같이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글만 써왔기 때문에 글을 완성한 것만으로 이미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차고 넘치게 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완결이라고 소리쳐봤자, 누군가 읽고 미약하더라도 어떤 반응을 보일 때에야 글을 쓰는 진정한 목적이 완성됨을 알았다.
스스로도 몰랐던 마음이지만 나는 좀 더 많은 사람이 내 글을 읽어주길 바랐고, 좀 더 감탄하길 원했으며, 내 글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기를, 어떻게 이런 글을 다 썼냐고 감탄했으면 싶기도 했고, 위로가 됐다는 그런 말을 듣고 싶기도 했다.
내가 정말 혼자서도 괜찮았다면 굳이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며 충실히 살아갔겠지)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느꼈던 것을 내 독자들이 느껴주길 바랐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피드백하고, 내가 담은 의미를 알아주고, 공감해 주면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부정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조용히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너와 나는 다르니, 나는 아니더라도 너는 그럴 수 있겠구나.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하는 수용과 존중을 원했다. 고작 원하는 반응이래 봐야 '그래, 너는 그랬구나. 그때 너는 그랬구나' 하는 말이었지만 그 별거 아닌 말을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나도 몰랐지만, 아무리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 글을 쓴다고 해도 그저 이 하나만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홀로 외치는 소리는 자위행위에 그칠 뿐, 메아리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글을 쓰는데 들었던 내 지난한 노력과 헌신이 차차 잊혀 온전히 기억 속 과거의 일이 되어서야 나는 내 첫 작품에 긴 댓글을 달아준 사람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남긴 글을 다시 찾아 읽고는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데, 곱씹어 읽을수록 깊게 생각하고 시간을 들여 쓴 정성 어린 글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처음엔 원하는 대로 칭찬 안 해준다고 기꺼워하지 않던 한 치 앞 밖에 보지 못하는 나란 사람...ㅎ)
텀을 두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한층 더 고마움이 커졌는데, 내가 그토록 원하던 피드백과 내 글에 대한 진심을 예전역에 확보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내 안에서 맹렬히 들끓었던 글을 향한 애정이 서늘히 식고 나서야 뒤늦게 타인으로부터 받은 진심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글을 쓰는 동안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좋은 방향으로 천천히 변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생각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긴 시간 동안 아무 소득 없는 글쓰기를 계속 지속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글을 완성하고, 퇴고하고, 내보이고, 피드백을 기다리는 단계 단계마다 점차적으로 변해가는 마음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동안 내 글을 밖으로 내보이길 '고려'하지 않았을 뿐 나 자신이 정말 원치 않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간절히 원하면 되려 멀리하기도 하고, 얻지 못할 게 무서워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조금씩 용기를 얻고, 차례차례 마음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이제는 보이는 것 같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혹 내 글을 발견해 줄 타인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지, 나만을 위해 글을 쓴다는 말이 실은 내보일 자신이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는지 말이다. 아무래도 조금은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