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를 좋아하니까 특별편
세상에는 중요한 일이 많다. 세간을 들썩이게 하는 특별한 음식도 많다. 하지만 나는 지금 옥수수를 생각한다. 노란 옥수수, 하얀 옥수수, 점박이 옥수수. 삶은 옥수수, 구운 옥수수, 통조림 옥수수. 시장 옥수수, 휴게소 옥수수, 노점의 옥수수. 아, 옥수수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옥수수가 먹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문밖에는 한 무더기의 옥수수가 있다. 그러니 옥수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지금보다 적절한 때는 없을 것이다.
매년 여름 한국에는 옥수수 대란이 일어난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옥수수를 사랑하는 동지, 아니 경쟁자라면 알 것이다. 7월은 옥수수가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달이다. 6월부터 모두 경쟁적으로 옥수수를 주문한다. 유명 생산지의 옥수수는 몇 주 전에 예약을 해야만 제때 받아볼 수 있고, 물량이 떨어지거나 장마가 닥치면 갑자기 주문 취소 문자가 날아오기도 한다. 옥수수 광인(狂人)들은 좋은 품질의 옥수수를 받아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실패를 감안하고 개당 2천 원 내외의 옥수수를 주문한다. 흔하디 흔한 작물인 옥수수는 산지직송의 대중화로 나름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래 봐야 오직 이 계절의 일이기는 하지만.
옥수수는 신선식품이다
옥수수는 어떤 음식에든 잘 어울린다. 치즈에 홀딱 빠진 한국인들이 모든 음식에 모짜렐라 치즈를 넣기 시작한 이래로 그것과 찰떡궁합인 옥수수가 들어가는 음식의 종류도 점점 늘고 있다. 한국식 콘치즈(통조림 옥수수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치즈를 얹어 익힌 것)가 세계로 퍼져 나가는 지금, 한국인에게 옥수수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들어 있을 확률이 높은 식재료'이다. 하지만 옥수수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확신 있게 대답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옥수수는 주식도 주재료도 아닌 부재료일 뿐이다. 왜? 우리가 평소에 먹는 것은 신선한 제철 옥수수가 아니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공하지 않은 옥수수는 신선식품이다. 생딸기와 딸기잼이 전혀 다른 음식이듯 옥수수도 신선한 옥수수만이 본연의 맛과 식감을 보존하고 있다. 말라서 딱딱해진 옥수수는 옥수수란 이름의 곡식이며, 옥수수 통조림은 가열 조리된 가공식품이다.
한국에서는 7월과 8월이 제철인 옥수수. 수확 후 사흘 안에 먹지 않으면 타고난 맛과 향을 잃는다. 국내산 제철 옥수수와 수입산 냉동 옥수수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품종에 따라, 산지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도 다르다. 그렇다고 옥수수의 범주에서 통조림 옥수수와 곡물 옥수수를 빼놓을 수는 없다. 단지 누군가 나에게 옥수수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옥수수 말인가요?"라고.
한국의 스위트콘, 초당옥수수
초당옥수수는 일반 스위트콘(단옥수수) 보다 당도가 높은 '슈퍼 스위트콘'이다. 이가 닿는 순간 톡톡 터지는 과일 같은 식감, 촉촉한 생밤을 떠올리게 하는 달큼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옥수수라 하기에는 낯선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 맛은 분명 강렬하다. 태국산 스위트콘이 단옥수수의 전형적인 맛이라면 초당옥수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장르랄까. 남들 다 아는데 그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먹는다. 초당옥수수 열풍으로 이것을 재배하는 농가도 많아져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도 했다. 다음 해에도 먹으려면, 올해 열심히 먹어서 농가 소득을 늘려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초당옥수수를 생으로 먹기도 하지만 익혀 먹는 쪽이 더욱 달콤하다. 조리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물에 삶거나 찌는 것은 단맛이 떨어지므로 재능 낭비이고, 전자레인지만으로 충분하다. 한꺼번에 조리할 필요도 없고, 당장 먹을 만큼만 익혀 먹는다.
초당옥수수를 조리할 때는 칼로 옥수수알이 시작되는 부분의 심지를 잘라낸다. 이때 심지에 껍질이 붙어 있다면 좀 더 잘라준다. 익혀서 뜨거워진 옥수수는 껍질을 벗기기 어렵기 때문에 미리 껍질과 옥수수를 분리해두는 것이다. 껍질과 수염이 같이 들어가야 풋옥수수의 달달한 향이 밴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조리하는 동안 알이 마르지 않도록 껍질을 도톰하게 남겨두고 전자레인지용 뚜껑을 덮어 5분간 조리한다(2개 기준). 수분이 증발하며 열이 확 끼치므로 꺼낼 때는 손이 데지 않도록 장갑을 낀다. 뚜껑을 열고 한 김 식혔다가 잘린 부분부터 껍질을 벗기면 말끔하게 분리된다. 다른 옥수수를 조리할 때에도 이것만은 기억한다. 심지를 자를 것, 껍질째 익힐 것.
찰옥수수에 대한 오해
찰옥수수는 쫄깃하고 차진 식감이 특징이지만 딱딱하고 맹맛이라는 비난을 자주 듣는다. 찰옥수수 구매자들의 후기를 보아도 '맛있다'라는 평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비난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옥수수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언제 수확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당도와 수분을 품고 있는지, 알을 터뜨리지 않으면서 촉촉하게 삶으려면 대체 몇 분 동안 삶아야 하는지, 물과 소금은 얼마나 넣는 게 좋은지, 설탕을 넣을지 안 넣을지, 넣는다면 얼마나 넣어야 좋은지.... 옥수수를 삶을 때마다 늘 고민스러운 것이다.
가장 맛있는 찰옥수수는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강원도 인근 휴게소에서 옥수수만 삶는 장인이 껍찔째 가마솥에서 삶아내는 옥수수다. 하지만 그런 옥수수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 뒤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그 날, 그 옥수수를 되새기기 위해 제철이 되면 농장에서 찰옥수수를 주문해 먹는다. 수확한지 얼마 안되어 수분을 간직하고 있는 옥수수는 밥솥에 찌면 알곡이 백옥처럼 곱게 부풀어 예쁘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보기에 예쁜 옥수수가 신선하고 맛도 좋다는 것이다.
옥수수에 대한 기대가 지나친 나머지 찌는 방법도 매번 달라지긴 하지만 올해는 이렇게 해먹었다. 소금 1스푼, 설탕 3스푼을 녹인 1리터의 물을 준비한 다음 옥수수 5~6개를 밥솥에 넣고 준비한 물을 넣는다. 옥수수가 잠길만큼만 추가로 물을 넣어주고 영양찜 40분 코스로 조리한다. 설탕을 넣었다 해도 뉴슈가를 넣지 않으면 좀처럼 단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본연의 옥수수향을 간직한 은은한 맛을 참 좋아한다. 이렇게 직접 쪄먹는 것은 오로지 제철의 찰옥수수다. 제철이 아니라면 차라리 노점에서 사 먹는 편이 낫다. 철이 지나 맛이 떨어진 옥수수를 어떻게든 팔만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노점의 상인들. 옥수수도 많이 쪄 본 사람이 맛있게 찐다. 물론 입맛에 맞는 옥수수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맛을 떠올리면 어떤 옥수수라도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다.
찰옥수수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원래 달지 않다는 것이다. 찰옥수수의 장점은 담백함과 쫄깃함이다. 쫀득한 식감의 옥수수는 입안에서 오랫동안 씹게 되는데, 호화된 쌀처럼 침과 오래 섞일수록 은은하게 단맛이 돈다. 스위트콘이 패스트푸드라면 찰옥수수는 슬로푸드다. 초당옥수수는 한 입 가득 씹으며 빠르게 해치워야 그 맛이 충족되는 반면, 찰옥수수는 차분히 알곡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가는 묘미가 있다. 물에 담가 삶을 때 다소 짭짤하게 간하여 옥수수 심지에 스며든 물을 쓰읍쓰읍 빨아먹는 것도 옥수수 껍질과 수염에서 우러난 향미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미 아는 맛이라서 좋은 것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맛에 대한 경험을 되새기는 일이다. '이미 아는 맛'이 주는 기대와 설렘이 그 음식을 다시 먹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 기억보다 지금 이 음식이 맛있지 않아도 '내가 제일 맛있게 먹었던' 그날, 그 음식의 맛이 오늘의 감각으로 일부 재현된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 음식에 대한 실망도 커, 자주 먹지 못하게 된다. 좋았던 옛 기억을 되살리는 편이 당장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즐겁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맛있는 옥수수보다 맛없는 옥수수를 먹은 적이 더 많다. 하지만 그래도 옥수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항상 맛있는 옥수수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심지에 빼곡하게 박혀 있는 옥수수의 낱알을 떼어먹는 재미도 맛의 일부다. 음식에 대한 긍정적인 데이터가 쌓이면 마침내 그 음식을 좋아하게 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구운 옥수수가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옥수수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옥수수를 지나치지 못하고 사 먹는다. 옥수수를 먹는 일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고 동시에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도 옥수수를 파는 집이 보이면 발길을 멈춘다. 옥수수 맛집은 멀리 있지 않다. 옥수수 제철에, 옥수수 껍질이 앞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옥수수 노점을 만나면 일단 사 먹어 본다. 옥수수 한 봉지(2~3개 들이)에 5천 원을 투자할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맛있는 옥수수를 먹을 수 있다. 진공 포장해서 나오는 냉동 찐 옥수수가 아무리 맛있다 한들, 노점에서 막 쪄낸 옥수수에 비할 순 없다.
오늘도 나는 옥수수를 먹으면서 생각한다. 이 옥수수가 앞으로 옥수수를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긍정적인 데이터로 남기를, 좋아하는 것에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을 계속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낱알 하나, 씨앗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떼어먹으며 옥수수에 대한 나의 성실함에 매번 감탄하듯, 그 성실함이 보답받을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