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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Dec 16. 2022

안 그래도 숨찬 임산부에게 마스크까지

코로나에서 버틴 임신, 출산, 육아의 시간들


이전에도 저혈압이 좀 있었다. 빈혈이랑은 또 다른 느낌인데 생리통이 심한 시절에는 생리할 때 저혈압이 같이 오곤 했다. 임신 15주쯤 되었을까 아침에 집에서 안 쓰는 의자를 무료 나눔 하고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왔는데 여름이 다가와서 집이 유난히 덥고 습했다. 왜 이렇게 덥지 잠깐 생각하고 세탁기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시야가 모자이크처럼 조각나서 점점이 흐려진다. 선명한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귀는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먹먹해져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더 심해지면 ‘삐이-’ 하는 이명이 들린다. 그렇게 된 후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핑 돈다. 다행히도 침대에 누워서 안정을 취하니 조금 뒤 괜찮아졌다. 임신한 뒤에는 이유 없이도 가끔 저혈압 증세가 오곤 했다.



Photo by Leohoho on Unsplash


임신 초기가 지나고 종일 잠만 잘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러 다니기로 했다. 바로 미술학원에 가는 일이었다. 홍대 근처에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었고 색연필로 인물을 그리는 수업이었다. 하루는 가서 눈 하나를 다음 주에는 코 하나를 그리며 연습하다가 마지막에 얼굴 전체를 완성했다.


아기는 8주부터 다시 요가 수업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전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하거나 걷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마스크였다. 산소가 턱없이 부족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찬데 거기에 마스크를 하니 너무나 힘들었다.


공항철도에서 내려 연남동 거리를 걸어가면서 ‘아기가 나오면 여길 또 언제 오겠어.’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남으면 카페에서 혼자 테이크아웃 커피도 사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한가한 식당이 있으면 혼자 밥도 먹었다. 주말이었지만 신랑이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혼자라도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요일 오후에 듣는 수업에 열심히 참석했다.     




선생님과 8명의 수강생은 모두가 여자였다. 색연필을 뭉개듯이 꾹꾹 눌러 채워 색칠하는 게 이 선생님의 특징이었다. 그렇게 색칠된 인물은 마치 빛을 받아 얼굴에 광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코로나 이전에 어떻게 수업이 이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말 한마디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와서 그림만 그리고 집에 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다 그랬다. 차분한 선생님의 목소리와 색연필의 끼적이는 소리만 조용히 들려왔을 뿐이었다.


하루는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저혈압 비슷하게 눈앞이 캄캄해져서 밖에 나가 쪼그려 앉아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거기 있는 누구도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말할 기회도 없었으며 왜 밖에 나가서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는지 묻는 이도 없었다. 나는 수업을 최선을 다해 들어보려 했으나 몸이 점점 무거워지자 결국 마지막 수업 몇 개는 빼먹을 수밖에 없었다.    

  


Photo by Anshu A on Unsplash

그건 취미 생활이었으니 그만두면 됐지만 학교 수업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서 마스크를 쓰고 본격적인 교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처음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아이들도 등교가 어색하고 떨렸는지 어떤 말도 잘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 동안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은 교단에 있는 나 혼자였다. 코로나를 겪고 나니 아이들한테 프린트물 한 장 나눠 줄 때도 손이 떨리더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익숙해진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고도 예전과 같이 신나게 떠들고 놀았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수업이 있는 날에는 마스크 때문에 산소부족이 확실히 왔다. 영어 동아리도 이때부터는 대면 수업으로 했기 때문에 매주 수요일에는 방과 후 수업을 하고 가야 했다. 그렇게 집에 가면 마스크를 벗고 쉬어도 온몸이 아프고 두통이 왔다.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져서 잘 수밖에 없었다. 보건실에서 쓰는 휴대용 산소캔이 생각나서 사보기도 했지만 머리 아픈데 효과는 없었다.      




그제야 3월에 코로나가 터지자마자 육아휴직에 들어간 보건 선생님이 부러웠다. 보건 선생님은 겨울 방학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육아휴직을 당겨서 썼고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원래 학교인 서울을 떠나 인천에 파견 교사로 와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파견 기간 중 휴직이 불가능했다. 아기를 낳으러 갈 때 쓸 수 있는 90일의 출산휴가만 가지고 있었다.


임신 막달까지 일하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주변에 그랬다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당연히 학교에서 수업하다가 아기를 낳으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신 중에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하는 건 정말 못 할 짓이었다.


배가 불러올수록 수업도 학교도 벅찼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이렇게 막달까지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배도 제법 티가 나게 불러서 여태껏 임신 사실을 몰랐던 아이들이 ‘선생님 임신했어요?’ 하고 묻기도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다. 한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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