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두치 Feb 05. 2024

타흐리르 광장에서

혁명과 감시의 거점, 카이로에서의 2주


그 후로 2주간 카이로에 있었다. 카이로에서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 머물렀다. 타흐리르가 지겨워질 때쯤엔 서쪽에 있는 자말렉섬으로 넘어가 벨리춤을 배우거나 다르부카 서클에 참여했다.



카이로에서 자주 갔던 곳은 아타바 광장(attaba square)이다. 아타바 광장은 이집트의 문화와 혁명이 시작되고 뒤엉킨 중심지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밤시간대엔 한걸음도 떼기 힘들 만큼 거리는 붐볐다.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칸엘칼릴리(khan el khalili) 시장은 아타바의 일부에 불과할 만큼 광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아타바 광장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집트 역사와 삶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광장을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오면 엘 피샤위(El fishawy) 카페에 갔다. 엘 피샤위는 아타바 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1700년대에 생겼다. 셰이빈나나차를 홀짝이고 있으면 우드(oud)와 타블라(tabla) 연주자, 이주민 출신의 상인들, 길고양이들이 공간을 드나들었다. 차가 식어 씁쓸해지면 설탕을 한, 두 스푼 추가해 마셨다. 엘 피샤위의 차 한잔은 세상이 아닌 나의 리듬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엘 피샤위에서의 차 한잔

 

"카이로에 2주나 있으면서 왜 피라미드에 가지 않았어?" 카이로에서 만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다. 내게 피라미드보다 중요한 장소는 따흐리르 광장이다. 한국에 광화문 광장이 있는 것처럼, 이집트에는 따흐리르 광장이 있다. 따흐리르는 이집트에서 가장 큰 광장 중 하나고, 카이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전국 각지의 200만 명 이상이 모여 독재자 무바라크의 퇴진을 외쳤고, 이집트 혁명의 거점이 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카이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마치 이 큰 규모의 시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버스는 평소 멈추던 곳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섰다. 기사는 시위 때문에 거리가 통제되어 여기서 운행을 끝낸다고 말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전국각지에서 모인 많은 시민이 타흐리르 광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동시에 혁명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봤다. 사실 버스 승객들은 비밀경찰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연기를 했을 뿐, 모두 시위 참여자였던 것이다."- 라흐만


저 멀리 보이는 따흐리르 광장


따흐리르는 '해방'이라는 뜻이다. 나는 카이로에 머무는 동안 아타바 광장이나 자말렉에서 따흐리르 광장까지 들어가는 버스를 타길 좋아했다. 따흐리르 광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때면 독재정권에 맞서 자유를 외쳤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마다 깊은 슬픔을 느꼈다. 과거 해방을 외치던 광장은 더 삼엄한 감시가 진동하고 있었다. 광장은 누구도 잠시 쉬어가기 어려운 장소가 됐다. 사진 하나를 가까이서 찍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따흐리르 광장의 방문객들은 몸수색을 당하거나 신분증 제출을 요구받기도 한다. 군인들은 밤낮없이 광장을 감시하며 소동을 막기 위해 경계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따흐리르 광장을 감시하는 군인들.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두 사람다 나를 쳐다봐서 황급히 핸드폰을 내렸다.


카이로에 머무는 2주 동안, 나는 광장 주변을 벵글벵글 돌며 한국에서 만난 이집트 사람들을 생각했다.  아흐메드(가명)와 림(가명), 사라(가명)가 생각났다. 그들은 대체로 2011년 아랍의 봄 전후로 발생한 국가적 차원의 폭력에 노출되어 한국까지 오게 된 사람들이다. 군사정권이 운영하는 감옥 현황이나 고문 실태를 보도하거나, 인권활동가를 탄압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활동을 하다가 군사기밀유출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포함한 징역을 살고 나와서 다시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상황에 있었다.



따흐리르와 광화문 광장 사이에서


우리는 2018 8, 유난히 더웠던 여름에 청와대, 광화문 광장 앞에서 만났다. 나는 그들로부터 청와대와 광화문 광장 앞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는 메일을 받았고 다음날 현장으로 갔다. 그곳엔 돗자리 하나 없이 시멘트 바닥에 앉아 홀로 단식하고 있는 아흐메드와 림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그들은 이미 단식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고, 정말 아무런 대책 없이 거리에 나앉아 있었다. 보통 한국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면,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자리를 마련하거나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소금이나 물을 준비하지만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나와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건 이들은 목숨을 걸고 거리에 나온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그동안 아무도 그들의 단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절박하게 썼던 도움 요청 글, 이때 한 달 가량의 기간 동안 나도 그들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저희는 고국에서 혁명운동가였습니다. 저희는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고국은 그런 저희를 체포했고, 고문했고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저희에게 대한민국은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저희는 고국의 박해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한국에 찾아왔습니다.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난민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존중합니다. 난민을 안 좋아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용납될 수 없는 일은 있습니다. 난민에 대한 혐오, 차별적인 언행,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저희는 난민이라는 이유로 길에서 여러 번 폭행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폭력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언제까지 손을 놓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 중 누군가 죽은 다음에야 손을 쓰려고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흐메드
"저희는 난민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지만 이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난민이슈가 좌우 대립의 희생물로서 정치다툼에 이용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은 정책적인 문제이고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법이 존재하는 한 그 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저희는 한국이 국제협약에 따라 저희의 권리를 지켜주길 바랍니다."- 림
"난민을 향한 인종차별이 가득한 나라에서 저와 제 두 딸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겁니까? 저희는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심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싱글맘으로서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아무런 직장이 없는 채로 두 아이를 양육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사라 , 2018년 청와대 앞 단식농성 기자회견 중


그해 8월부터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결국 한 달가량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림은 28일이나 되는 긴 기간동안 단식을 하게 되었다. 아야(가명)는 단식 농성을 하는 중에 출산을 했고 림과 아흐메드는 몸이 많이 상해 결국 입원을 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매주 열리는 집회와 기자회견에 참여해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러 노력을 통해 국가인권위원장과 청와대 비서실장, 법무부 담당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우리의 이야기는 듣지 않은 채 난민의 존재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그 답변 앞에서 다시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존재가 합의를 거쳐야만 한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정부관계자들의 "노력하겠다"라는 공허한 대답은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당장 시위 현장에 찾아와 "죽여버리겠다"는 사람들을 맨몸으로 덜덜 떨며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폭력의 상황을 중단하고 싶었을 뿐이다. 거리에서 당장의 폭력을 견뎌내야만 하는 우리에게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인지 그저 웃음만 나왔다. 결국 모든 책임은 눈덩이가 되어 우리가 오롯이 져야할 몫으로 돌아왔다.법무부는 이 괘씸한 사람들의 난민 지위를 불인정했고 림은 출국하게 되었다. 그해 아흐메드와 나는 다시 입원했고 우리는 다시 서로를 볼 수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랍의 봄을 타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