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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y Nov 17. 2023

프롤로그

전공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만..

스무 살이 되던 2000년 겨울부터 코로나로 강제 퇴사를 당했던 2020년 말까지,

인생의 거의 절반이자 20~30대의 청춘을 모두 보내며 했던 나의 밥벌이는 '외식서비스업'이었다.




2000년 겨울,

외식업계에서 가장 바쁜 시기로 알려진 12월의 중순이 시작될 무렵, 나는 한 때 우리나라 패밀리레스토랑을 주름잡으며 온갖 미디어에서도 유명했던 '빨갛고 하얀 스트라이프'의 그 '맛이 즐거운 곳'에 입사를 하게 됐다.


사실 시작은 아르바이트였다. 

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이기도 했고, 당시 전공을 살린 취업을 하기에도 준비가 돼있지 않았던 터라, 생전 가본 적도 없던 서울에만 있다는 그 외국계 레스토랑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엄마 친구의 딸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무작정 상경을 했었다.


당시엔 패밀리레스토랑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더군다나 시기가 시기인 만큼 매일 대기자가 넘쳐 나는 매장에서 이제 갓 입사한 신입이 할 일이라곤 'Back job'이 전부였다.

세척되어 나온 커트러리류를 말려 테이블 세팅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거나, 'Bustand'라고 불리던 홀의 보조 주방(수프나 하우스샐러드, 디저트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져 나가며, 기본 세팅에 필요한 물품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는 곳)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낯선 일이기도 했고, 몸이 쉬운 일도 아니었지만 희한하게 뭔가 재밌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 나의 첫 직장생활에서 이후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준 'HONEY'도 만나게 된다.


지금의 기억으론 당시 최저시급이 2,000원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탄산음료가 3,200원, 버거 메뉴가 11,900원, 스테이크류는 30,000원이 훌쩍 넘는 걸 보고는(롯데리아의 버거와는 태생 자체가 다르다는 걸 실물을 보고서야 알았고, 당시 스테이크 메뉴였던 필렛 미뇽은 180g이었다) 문화 충격을 받기도 했다. 더욱이 메뉴가에 부가세를 따로 받던 시절이라 콜라 한 잔이 3,520원이면 내 시급의 두 배에 가깝다는 생각에 오기가 생기기도 했었다.(메뉴가에 부가세를 별도로 받던 방식은 2013년에 금지된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바빴던 12월을 잘 버텨내며, 이젠 'Back job'만이 아닌 담당 테이블이 생기고, 그 테이블에 가서 "담당 서버 'HONEY'입니다"로 나를 소개하던 어느 날부턴가 일이 더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봉천동 옥탑방에서 살며, 유니폼을 손으로 빨아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낯선 서울 생활도 싫지만은 않았고,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익숙지 않은 용어들이 잔뜩 늘어선 많은 매뉴얼들을 공부해야 했던 일들도 모든 게 흥미롭기만 했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고, 그 작은 시골에서 고등학교 내내 친구들이 '서울, 서울' 노래를 불러도 늘 시큰둥하기만 했던 나였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학에서 하던 공부와도 전혀 상관없는 일로 서울 한복판에서 내가 밥벌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냥 보내는 시간들이 아까워 방학과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아르바이트나 할까? 하며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나 적성에 맞을 줄이야..


당시 '맛이 즐거운 곳'엔 별도의 교육기관이 따로 있어(이태원에 아카데미가 있었다) 기수별로 정규직 채용을 하고 있었지만, 나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정규직 전환 시험을 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르바이트 6개월이 되던 날에 담당 서비스매니저에게,

"저, 정규직 전환 시험 보고 싶습니다"

라고 요청을 했고, 

그저 '안정적으로 조금만 더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내린 결정 하나가 10년의 직장생활이 될 줄은, 

당시만 해도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었다..








<배경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조코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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