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5
고등학교 1학년 과학탐구실험 수업을 맡았던 해에, 외국인 학생이 있는 반에서 수업한 적이 있다. 당시 학생은 한국말을 잘 못해서, 내가 한 단어씩 끊어서 천천히 말해야만 한국말을 간신히 알아들었고, 내 질문에 아주 쉬운 단어를 사용한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아예 영어로 대답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학생은 수행평가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발표가 필요한 수행평가는 모두 거부했고, 보고서는 영어로 적어서 냈다. 수업 내용도 잘 못 알아들어서 옆에 앉은 친구가 영어와 손짓, 발짓을 섞어 재차 설명해야만 했고, 그래서 전반적으로 속도가 다른 친구들보다 느렸다. 당연히 학생은 수업에 전반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내 눈에 그 학생이 뭔가 열심히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부족한 한국어 실력 때문인지 포기하는 듯했다.
그러고 1년이 지났다.
2학년 생명과학1 수업에서 작년의 외국인 학생을 다시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학생과 대화를 한 번 했는데, 작년에 비해 한국말이 많이 는 것이 보였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작년과 다르게 평범하게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1년 동안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생명과학1 수업에서도 수행평가의 시간이 돌아왔다. 수행평가는 생명과학 지식과 관련된 주제를 선정해 자신만의 결론을 융합하여 자유롭게 발표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발표를 거부했던 외국인 학생은, 발표가 거의 다인 올해의 수행평가를 거부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다고 적극적으로 말했다. 나는 조금 놀랐다.
학생의 발표 주제는 ‘근성장’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근섬유를 이루는 액틴과 마이오신 필라멘트가 손상되면 근육통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필라멘트의 손상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근육이 성장합니다. 이 때문에, 근육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근육통이 꼭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근성장과 같습니다. 근육이 성장하기 위해서 근섬유가 찢어지는 근육통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 역시 성장을 위해서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 한국말이 완전하지 않아, 학생의 발표는 이미 적어놓은 대본을 보고 줄줄 읽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어떤 발표보다 더 깊은 울림을 느꼈다. 목뒤가 찌릿찌릿했다. 또박또박 한글로 꾹꾹 눌러 적은 학생의 보고서에는 1년 동안의 노력과 성장이 담겨 있었다.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해서 발표를 거부하고, 보고서를 전부 영어로 적어서 냈던 아이가 여기까지 왔다.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 학생이 한국의 고등학교를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거치는 장소로 생각하거나, 한국어가 안되니 공부를 포기하고 졸업만 하려고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은 여기까지 왔다.
너도 1년 동안 많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거쳐 이만큼 성장했을까?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어눌한 발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발표를 마치는 학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배웠다. 성장통을 굳세게 견디며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성장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반성했다. 내 행동과 마음가짐은 어떠한지를. 나는 고통을 인내하며 노력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다음 해에 나는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외국인 학생의 3학년 생활은 어떠한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잘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통과 인내를 성장의 가치로 여길 수 있는 아이이므로. 또, 포기하지 않고 해내려는 열정이 있는 아이이므로. 그 학생이 앞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먼 거리에서나마 응원하고픈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