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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Sep 09. 2024

창신여고 무용부 'HERA'

그녀들의 춤사위

3월 3일 창신여고의 개학날.


신입생들은 모두 커다란 학교 실내 체육관에 모였다.  

교장, 교감선생님과 학생주임 선생님과 각 학급의 담임 선생님들이 차례로 인사를 하고

교장선생님의 길고 긴 환영사를 들은 후 종료되었다.


다들 가방을 챙겨 배정받은 학급으로 가려는데

이 학교의 19개에 달하는 엄청난 써클의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당시 표현법으로 좀 예쁘고 깔쌈해 보이는 신입생을 먼저 데려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신기한 창신여고의 문화였다.

 

N은 1학년 3반을 찾아서 가는 5분의 시간 동안 여러 명의 여자선배들에게 붙잡힌다.


"어머 ~ 야. 안녕 ~ 니 우리 써클 들어올래? 우리 수지침반인데~ 침놓는 거 배우고, 학교축제 때

남자애들 침놔주고 하거든 ~ 우리 인기 많다 ~"


"야야~ 거기 신입생! 우리 RCY인데 들어올래? 우리 아무나 못 들어오는데 니 특별히 받아줄게"


"안녕~ 예쁜아 ~~ 우리 써클 폴라칠성이라고 ~ 별자리 연구 써클인데 ~

여름방학에 남학교랑 쪼인해서 캠핑 가거든 완전 재밌다! "


온갖 다양한 써클의 선배들이 교내 캐스팅을 벌이는 대환장의 문화.

N은 정신이 없었다.

'내가..중딩때 문지석 걔땜에 그 피해를 받았는데... 무슨... 남자애들이랑 어디를 가~~ 짜증 나게...!'


N은 낚시줄처럼 던져대는 선배들의 손길을 뿌리치는게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때 저 멀리.. 조용한 통로로 빠져나가려는 찰나.

왠 까무잡잡한 피부에 폭탄 파마머리를 한 여자선배가 싱긋 웃으며 N에게 걸어오는 게 아닌가.


N은 왠지 이번에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파마머리 선배.

"안녕하세요 ~~ 신입생 맞죠?"


N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12명의 여자선배를 거치면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 홀린 듯이 대답을 한다.


"아... 네.. 네..."


선배

"어.. 이름이 뭐예요?"


N

"아... 저는... N이에요...'


선배

"아.... 이름도 예쁘다 ~~

나는.. 김세나예요.

.. 혹시 들어봤나? 우리 학교에 '헤라'라고... 무용 동아리 2학년인데...

혹시 무용 좋아해요? 춤이나 음악은"


N은 자신과 전 혀 다른 세계의 취미라고 생각한 단어를 듣고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 무용.. 같은 거 잘 못해요... 음악은 좋아해요"


선배, 맞장구를 치며

"어머어머 그렇구나~~ 나도 처음엔 무용 완전 못했어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해 본 적도 없고..

근데 음악 좋아하죠? 음악 좋아하면 ~~ 배우면서 하면 돼요 ~ 진짜 고딩들은 입시 때문에

매일 공부해야 하는데.. 운동하면서 체력도 키워야 공부도 잘하잖아요 ~

그래서 우리 써클 들어오면 ~ 체력도 키워지고 음악에 맞춰서 선배들이 무용도 쉽게 가르쳐 주거든요 ~

연말에 축제 때 우리가 주인공이에요! 우리 학교에서 써클 별명이 '섹시 해라'거든~! "


그렇다. 그 선배는 무용뿐 아니라 언변의 달인이었다.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던 N은

'공부를 잘하기 위해선 체력이 중요하다'는 논리에서 시작된 그 설득에 홀라당 동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 주인공'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N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었다.


'주인공이에요.'

'주인공'


N은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주인공에 이끌려 N은 마치 순간이동을 한 듯이

그 파마머리 여자 선배의 손에 이끌려 무용 연습실로 향했다.

 

드르륵 -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N처럼 붙잡혀온 선별된 신입생들이 우르르 앉아있었다.

대략 10여 명 정도 되어 보여고

신입생을 구경하러 온 화려한 비주얼의 2, 3학년 여자 선배들도 대량 7~8명 되어 보였다.


얼떨결에 무용실 바닥에 일렬로 앉아서는

써클 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2학년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A4용지를 돌리더니 가입 신청서에 이름, 학번 등등을 적는다.


이미 발은 담가졌다.

N은 인생에 한번 상상해보지도 않았던 'Hera'라는 이름의 '무용부' 부원이 된 것이다!


그다음부터 N의 고등학교 생활은 헤라로 시작되어 헤라로 끝이 나는 일과였다.

선배들과 1:1 강제 마니또를 맺은 후

매주 과자나 선물 등을 사서 조공 아닌 조공을 바쳐야 했고

점심 연습에 늦거나 정신상태가 해이하다고 판단되면 불시에 '1학년 전원 소집'명령이 전달되어

무용실에서 머리를 박고 기합을 받거나 오리걸음을 받으며 발로 걷어차였다.

물론 심해지기 전에 끝냈으므로 누구 하나 문제를 삼진 않았고

그저 그 사립학교의 오래된 풍습처럼 다들 울며 겨자 먹기로 적응하며 지내게 되었다.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번갯불처럼 먹어치우고 슈즈와 체육복을 입은 채

무용실로 달려간다.

정식 연습이 시작되기 전 10분간은 스트레칭을 하며 다리를 찢고 몸을 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배들이 밥을 먹은 후 꺽꺽거리며 들어오면 일괄 잔소리 한바탕과 함께

무용 연습이 시작된다.

장르는 괘 다양하고 춤은 꽤나 전문적이었다.

가요, 재즈, 벨리댄스, 현대무용, 한국무용에 라틴이나 살사까지 배웠으니

헤라는 이 고등학교에서 비공식 연예인 그룹이나 마찬가지였다.

12월에 열리는 학교축제에서 헤라는 단연 독보적인 연예인들이었고

그 나름의 명예로 인해서인지.. 교내 일진 무리들도 헤라 소속은 쉽게 건드리지 않는

무언의 룰 같은 게 있었다.

N은 매일 뛰고 기합 받고 다리를 찢으며 체질에도 안 맞는 온갖 무용을 섭렵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확실히 체력이 길러지는 것도 같아서

그 파마머리 선배 말이 다 맞기는 하구나.. 하고 수긍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진의 건드림 조차 없으니 일석이조라고 느낄 수밖에.


더하여 여고, 남고가 같은 동네에 4개나 빼곡히 모여있다 보니

이 여고의 소문은 주변 남고에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올해 헤라 신입생의 상태는 마치 교내 방송처럼 즉각 전송되는 것이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하는 길은 모든 학교가 겹치는 동선이라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고 저 학교에 누가 헤라 소속이라느니, 누가 여신이라느니 하는

그 시절 뜨거운 피의 10대 청춘들의 가십거리는 늘 헤라를 향했다.

 

달빛 도사의 소원성취를 받아 확연하게 달라진 외모의 N은

그중 단연코 소문의 중심에 섰다.


'뭔가를 내놔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까진 별... 뭐가 없잖아?

혹시 맨날 기합 받고 선배들한테 걷어차이는 게... 나름의 고통이라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정말... 그것뿐인가?'


이어지는 평화로운 일상에 N은 그저 만족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달빛 도사의 말이 생각나 불안하기도 했다.


모든 불안함은 미래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다.


그날 하교 후 무용연습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려서 N의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작은 가게가 하나 있다.

정식 명칭은 과자 가게 '메종드 로즈'였지만

다양한 문구용품과 국내외 수입과자, 쿠키, 아이스크림, 가끔 인도에서 수입해 온 특이한 인센스 스틱과

화려한 패션잡화들까지 한데 모아서 팔던

종합과자멀티잡화백화점이랄까.

'메종드 로즈'라는 좀 거창한 이름이 때론 어울린다 싶기도 했다. 


N은 종종 그곳에 들러야 했다.

문구, 과자, 헤어 액세서리 등

1:1로 맺어진 2학년 마니또 선배에게 조공 바칠 것들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물론 수시로 학용품이나 교재를 사야 한다며 대충 둘러대고 엄마에게 용돈을 타내야만 했다.

조공이 부실하면 금세 2학년 선배들 사이에서 욕을 들어먹기 일쑤였고

그게 쌓이면 1학년들은 연좌제처럼 단체 집합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조공 물품을 이만큼 사서 계산을 하려던 순간

카운터에서 일하던 남자 대학생이 N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주춤거리며 카운터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어 N에게 슬쩍 내밀었다.


"여기요... "


N은 봉지를 펼쳐 계산된 과자들을 담으려다가 멈췄다.


"네?"


외모로는 10살도 더 되어 보이는 그 남자가 혼자 얼굴이 붉어진 채 더듬거렸다.

 

"그.... 저희 가게에서... 이벤트 하거든요.. 여기 응모하세요!"


남자가 내민 것은 긁는 복권 사이즈의 번뜩거리는 재질의 쿠폰 같았는데

응모권이라 써진 글씨 아래

이름, 연락처만 달랑 쓰는 것이었다.


"아... 네."


N은 그 이상한 이벤트 응모권을 들어서 신기하게 봤다.

그리고는 별생각 없이 슥슥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건네준다.

"여기요."


남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되셨.. 습니다. 고마워.."


N

"근데 뽑히면 뭐 주는데요?"


갑자기 당황한 남자가 왠지 히죽 웃는 것처럼 보인다.


"아... 그....  사탕이요. 흐흐"



N

"사탕..?  아.. 네~~ 안녕히 계세요."



남자

"아! 네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다음 날.


그 남자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폴더폰에 모르는 번호가 찍히는데

뭔가 하고 읽어보니 고백이었다.


<안녕. 실은 어제 메종드로즈에서 쪽지 쓰라 한 오빠야.

내 이름은 오찬성이고, 동진대 4학년.

사실 응모권 아니고.. 너한테 관심 있어서 번호 따려고 한 거다.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얘기할 수 있나?

혹시 괜찮으면 답장 부탁한다. 그리고..>


당시 문자메시지 한통에 50원씩 나가던 시절이었고

장문 메시지가 제한되었는지 마지막 문장이 끊겨있었다.


N은 몇 번이고 문자메시지를 읽어 본 후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아.. 그 응모권.. 뭔가 허술하고 이상하다 했더니... 크크'


왠지 그 상황이 난처하면서도 퍽 흥미롭긴 했다.  


'흠... 답장을 해야 하나? 그래도 사람이 답장은 해줘야지.

근데 뭐라고 해? 나는 그 오빠.. 영 내 스타일은 아닌데?

동진대 다닌다고? 그럼 나랑 나이차이가 몇 살이야?'


N은 그냥 편하게 문자나 몇 통 주고받기로 한다.

<네.. 그랬군요. 그런데 몇 살이세요?>


바로 답장이 왔다.

<저 나이가 좀 있어요.. 군대 다녀와서 26이에요.>


남자는 첫 문자메시지에서 박력 있게 반말을 했던 거와 달리

이번엔 존댓말을 하다가 태도가 오락가락했다.

느낌상 원래부터 대담한 성격은 아닌데 괜스레 마초같이 반말을 했던 것일까.


N은 컥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는.. 17인데..>


문자는 이어졌다.


<9살 차이네요.. 하하.. 미안해요.. 아무튼 저 오찬성인데.. 편하게 오빠라고 해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봐요^^>


N은 오찬성의 앞뒤 말이 이해가 안됐다.


'내일 보자니? 음?.... 아?... 내일 거기 가게에서?

어우 싫어... 부담스럽게.. 내일 거기 안 갈 건데?'



다음 날 -


학교를 마치고 정문으로 나가는데

오찬성이 서 있다.

손에는 거대한 사탕바구니와 곰인형을 들고...


N을 보고 부끄러운 듯 다가오는 오찬성.


'뭐야... 내일 보자는 게 이 소리였어?!'



오찬성

"안녕.... 어제 싫다는 말 없길래.

오늘 화이트데이라서 사탕 샀는데.. 좋아하나?"


N은 초콜릿은 좋아해도 사탕은 별로였다.

그래도 나이 좀 먹은 대학 졸업반 오빠라는 남자가  

입고 온 패션도 왠지 모르게 촌스러웠다.

소심한 목소리에 N이 아니라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쉽게

홀릴 듯한 그 줏대 없는 분위기가 N이 선호하는 이성타입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하지만 얼떨떨한 채로 사탕바구니와 곰인형을 받아 들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갑자기 학교 앞까지 오셨네요..."


N은 어딘가 같이 가서 저녁을 먹자는 찬성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고

그 민망한 사탕바구니와 곰인형을 들고 절대 버스를 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찬성을 얼른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사물함에 그것들을 구겨 넣은 채 문을 잠근다.


"휴...   민망하네..."


오찬성은 그 후로도 N에게 자주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N은 간간이 의무적인 대답을 이어갔지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기에 N은 더 이상

메종드로즈 근처에 가지 않았다.


일부러 빙 둘러서 대형마트로 갔고

학교 앞에 혹시나 또 왔는지 살핀 후 집으로 가곤 했다.


그렇게 제 풀에 지친 오찬성의 연락도 드문드문 해지나.. 했더니

뭔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쏘아 올린 신호탄이 터진 듯

연신 그런 일이 물밀듯이 일어났다.


-


근처 남고로부터 '헤라'와의 미팅 요청은 쇄도했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왠 모르는 남자애가 폰 번호를 물어보기가 일상이 되었다.

길에서 마주친 남자애 무리들 중 꼭 누구 한 명이  

다가와서 N에게 연락처를 묻곤 한다.  


이 모든 광경을 그 누구라도 모르길 원했지만..


어느새 N의 학교에선 N을 부르는 별명이 암암리에 퍼졌다.


'걸어 다니는 번호판'


어디를 걸어가기만 하면 남자들이 번호를 물어본다더라 ~ 하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N의 친구들도 그 별명을 주워듣고는 N에게 얘기를 전해줬다.


그 얘긴 헤라의 선배들 귀에까지 들어가

N과 같은 1학년은 기고만장하다느니 싸가지가 없어졌다느니

니가 그렇게 잘났냐느니 하는 온갖 핑계로 기합 받는 회차만 늘어갔다.


N은 점점 괴로웠다.

'아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해....     도사님... 이건가요? 이거예요? 이거냐고요!!'


하지만 다시 사라진 달빛 도사는 아무 소식이 없다.


'원하던 외모'를 얻은 대신 치러야 할 대가는 이제 겨우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뿐이었으니.


그렇게 '걸어 다니는 번호판'으로 불리며

피곤한 접근들을 가시덤불처럼 헤쳐나가야 했다.


그렇게 12월의 겨울이 왔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창신여고의 화려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헤라의 공연은 단연코 모든 축제 관람객들이 고대하는 하이라이트 순서였다.

N은 올해 '한국 무용' 파트였는데

선배들이 고른 희한한 의상은 마치 물랑루즈 같은 붉은빛의 투명실크천으로

속살이 거의 다 비치는 한복치마에 어깨가 다 드러나는 희색 오프숄더 저고리였다.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시작되자  N은 그동안 빡세게 연습한 춤을 선보인다.

애잔한 곡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격정을 불사르는 빠른 템포의 곡으로 끝난다.

공연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의 환호성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N은 무대 위의 희열을 느꼈다.


춤이 끝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내려오는 길.


N은 왠지 속이 메스껍다는 느낌이 든다.

'아... 너무 어지러워... 죽을 것 같아..'

그렇게

계단 몇 칸을 내려오던 도중 -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계단에서 굴러버린 N을 모든 학생들이 목격했을 것이다.


"꺄악 ~~! 저기 누가 쓰러졌어요!"


-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감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의 아이보리 빛 천장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일터에서 달려온 엄마와 이모가

N의 침대 옆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깨어난 N을 보며 엄마와 이모가 간호사를 불러오고

간호사가 와서 눈알을 까뒤집어 보고 말을 시켜보더니

이제 온몸에 쥐가 날건대 마사지를 잘해주라고 엄마에게 당부를 하고

안심하라고 하며 병실을 나간다.


N은 정말 깨어난 직후부터 발끝에서 머리까지 온몸에 쥐가 났다.

몸의 감각은 마비된 듯했다.

엄마와 이모는 양쪽에 붙어서 N의 다리를 한쪽씩 잡고 부지런히 마사지를 한다.

그렇게 30분쯤 마사지를 받으니 쥐가 난 것이 천천히 풀리면서

드디어 피가 도는 느낌이 나고 조금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졌다.


N은 공연이 끝나고 내려오면서 기절을 했고

계단에서 굴러서 머리에도 상처가 좀 났는데 그건 큰 문제는 없었고

응급실에 실려와 검사를 받아보니 자궁에 문제가 생긴 지 꽤 오래 진행된 상태로  

몸에 복수까지 차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문제를 일으킨 종양을 제거하지 않으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하여

전신마취를 한 후에 긴급 수술을 하고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 자궁 한쪽에 어느새 자라 있던 종양은 잘 제거되었고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 발견되어서 자궁에는 큰 문제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언제 재발할지 모르니 건강관리에 특별히 유념하라는 것이다.  

다리부터 배까지 차오르던 물도 빠져서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벼워졌다.


N은 사실 몇 달 전부터 몸이 이상하게 무겁다는 느낌에

학교 오르막길을 오르는 게 숨이 격하게 차고 힘이 들었다.

아랫배가 단단해지는 것이 그저 똥이 차고 뱃살이 쪄서 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게 다리부터 부종이 차올라 배에까지 차고 있던 상태였다.


N은 자신의 몸에 그렇게 무감각했다는 게 스스로가 참 어이가 없었다.


의사가 와서는 몸이 그렇게 무거웠을 텐데 어떻게 그 몸을 이끌고 그렇게 뛰어다니고 춤을 췄냐고 했다.


N도 참 이상했다. 분명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것을 느꼈지만

왜 그렇게 무감각했을까.

어떻게 복수가 차오르는 그 몸을 이끌고 그렇게 격하게 춤을 췄을까.

모든 게 이상한 것 투성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그렇게 춤을 췄다.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동작을 한 번만 봐도 온몸이 흡수하듯 익혔고

몇 번 해보지 않아도 금방금방 춤 선을 복사한 듯이 춤을 추니

축제 무대에서도 단연코 1학년들 중 가장 메인에 서게 된 것이다.


그 1년간의 혹독한 연습과 춤이.. 뭔가에 강하게 이끌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N은 도사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나타나야 만날 수 있는 존재이기에 N은

마냥 병원 창 밖에 달을 보며 도사를 만나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점 회복이 되고 컨디션이 안정을 찾을 무렵.

학교 친구들도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오곤 했다.

괜히 걱정하는 표정이나 말대신

와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며 놀다 가니 N은 오히려 그 모습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렇게 병실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학급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급하게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N을 찾아왔다.


똑똑- 노트하며 조심스레 여는 문을 보니

엄마나 이모는 아니었고

아는 친구가 온 것인가 했지만...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문지석'


N은 정말 깜짝 놀랐다.

'문지석?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여차저차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지석 또한 N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갑자기 안부도 궁금하고 걱정이 되어 친구로서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손에는 한 송이 붉은 장미꽃까지 어느 꽃집에서 예쁘게 포장해서 왔다.


문지석은 N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N은 중학교 시절.. 그렇게 괴로웠던 시간이 다시 떠올랐지만

그때 문지석과도 오해를 풀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한 번도 정말 어찌 된 일인지, 진짜 네가 거짓말을 한 건지

얘기 한마디 없이 인연이 끊어졌으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이제야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은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N은 문지석에게 장난처럼 쏘아붙인다.

"야! 니... 진짜... 그때...

내 가슴 커서 좋아한 거가?  애들이 그러던데?"


문지석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져서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어??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뭐.. 변태가? 아니거든."


하지만 나중에는 이실직고를 한다.

처음엔 사실 같은 반 남자애들이 수군거리는 그 얘기를 듣고 몰래 쳐다보기는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진심은 그때 시작된 게 아니었단다.  


"내가 니 쫌... 좋아하게 된 건... 등하교 할 때 버스에서 자주 봤잖아...  

내가 니 옆에 타서 그렇다."


N은 의아했다.

물론 의식적으로 문지석과 버스에서 자주 마주친 걸 알고 있었고

가끔 옆에 나란히 서서 갔던 적도 많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둘 다 각자 헤드폰과 이어폰을 끼고 내릴 곳에 내리며

서로 대놓고 아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저 몇 번 마주친 기억뿐이었다.


문지석은 그때 N이 다른 애들과 다르게 이어폰이 아니라

대왕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길래

그 옆에 서면 N이 헤드폰으로 듣는 음악이 크게 새어 나왔다고 했다.


문지석은 이어폰을 늘 끼고 있었지만

N이 옆에 있을 땐 음악을 일부러 껐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N의 대왕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문지석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당시 N은 그 대왕 헤드폰을 엄마에게 졸라서 구매한 후

매일 등하굣길에 끼고 들었는데

당시 '드렁큰타이거'의 힙합 음악을 주로 즐겨 들었다.  


처음 문지석이 N의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중

완전히 꽂혔던 음악은 드렁큰 타이거의 '난 널 원해'라고 한다.


문지석은 그 후로 N과 버스에서 마주치면 일부러 그 근처에 바싹 붙어서 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N과 수영이 자신을 몰래 뒤쫓아오는 걸 눈치챘고


그 다음날 아침 등굣길에 N의 옆에 서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때 흘러나오던 음악은

드렁큰타이거의 '8:45 Heaven'이었다고 한다.


"며칠 전에 내 키워준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였거든 그때가....  

근데 니가 듣는 음악이 딱 그 노래인 거라.

그... 가사 알제? 니 그거 자주 듣던데.

그날 내가 점심시간에 니 찾아가서...  처음으로 말 걸었다 아이가.

내 좋아하냐고.  사실 내가 니를 좋아한 거긴 하다."


N은 그 순간 병실의 공기가 바뀐 것인지

자신의 마음이 바뀐 것인지 분별할 수는 없었다.


문지석이 가져온 붉은 장미꽃 한 송이에선 백만 송이 장미보다 더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N은 문지석에게 되묻는다.

마치 내 마음 알아달라고 투정 부리는 다 큰 남자를 달래듯이.


"야. 문지석.

니... 그거 약간 핑계 같은 거 아나?

니 사실... 그때 내를 엄청나게 좋아한 건 아니잖아.

그랬으면 그렇게 끝내지 않았겠지?

니도 그냥 긴가민가 애매한 상태였다가... 어정쩡하게 그냥 그렇게..

내를 포기할 수 있는 수준이었잖아. 딱히 엄청 예쁘거나 인기 많거나

주목받는 애가 아니었거든. 니랑 얘기를 많이 했던 사이도 아니고. 맞제?  

근데 지금은?  

우리 고등학교 축제 때 내 공연했잖아.

니 무대 밑에서 내 쳐다보는 거... 내가 다 보고 있었거든."


그랬다.

N은 문지석이 이미 춤을 추는 N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훤히 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 짧은 인연과 지금의 그 변한 눈빛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N

"지금 내가 중딩때 그 뚱땡이 시절이랑은 많이 다르잖아.

니 그래서 음악 핑계 대면서 이렇게 내 병원까지 찾아온 거 같은데..... 아니가?"


문지석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했다.

그러다 뭔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끈하며 고백 공격을 한다.


문지석

"어쨌든... 어쨌든 지금 내... 니 좋아한다. 봐라. 티 나잖아. 이런 장미를 아무한테나 사주나?

니가 뭐 갑자기 인기 많아졌다고 찾아온 거 아니고... 암튼 그것 때문은 아니고.

중학교 때는 니가 내 피해 다니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거지."


N은 장미꽃 위에 달빛 도사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문지석에게 나긋하게 설명한다.


"야. 문지석.

내는 그때랑 변한 거 없다. 그대로다.

근데..니도 똑같은 거 같다.

니 쫌 비겁하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까 갑자기 바뀐 것처럼.. 갑자기 솔직하고 남자다워진 것처럼 이러지 마라.

나는 어쨌든... 내 잘못인지 니 잘못인지  누구 잘못인지 그때일은 모르겠고,

아무도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누구나.

근데 나는 제일 친한 친구 두 명 다 잃어버렸다.

걔네가 내를 버린 건지 내가 걔네한테서 도망친 건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랑 다른 애가 아니라서...   니  안 좋아하고,  나는 지금도 내 친구들이 더 중요하다.

걔네가 내를 버렸다 해도.

무슨 말인지 알제...?

아무튼.. 장미꽃까지 주고... 와줘서 고맙다."


-


창 밖으로 해가 떨어져 코랄 빛 노을이 일렁일 때까지

문지석은 병실을 지키다 집으로 돌아갔다.

딱히 무슨 얘기는 없었다.

그저 둘 다 그 순간이 마지막인 것은 알았다.

문지석은 이어폰을 끼고 mp3를 켜더니

N의 왼쪽 귀에 이어폰 한쪽을 꽂아준다.


몇 년 전 자주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였다.

"너를 원해. 이 말 전해 ~  

나는 널 원해 ~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 기억해 나는 ~ 너의 모든 걸. "


-


엄마와 병실에 돌아왔다.

N은 중학교 때 친구라며 소개를 시키고 지석도 인사를 한다.  

엄마가 예쁜 장미꽃은 꽃병에 꽂아야 한다며 유리병 하나를 얻어와 물을 담고

장미를 꽂아서 N의 병실 유리창 앞에 놓아준 걸 본 후에

문지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저녁밥을 먹으러 나간 후

N은 장미꽃잎 위에 그릉그릉 코를 골며 졸고 있는 달빛 도사를 부른다.


"지금 잠이 와요?!!!"


N의 꽥 지르는 소리에 장미꽃잎을 한 개 떨꾸며 부스스 잠에서 깨는 도사.


"아우~~ 잘 잤다...  나 참..

환자들 드글드글한 병원에서 이렇게 꿀잠 자기는 처음이네.

어...N. 몸은 좀 괜찮어?"



N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황당한 표정을 짓고


"참.. 뻔뻔한 건 여전하시네요.  이제 괜찮은 거 다 알면서 ~~ 자는 척은!

자 - 이제... 설명 좀 해주시지요?  나를 왜 헤라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 홀린듯한 1년의 시간...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그 몸... 춤.. 음악...

다시 나타난 문지석까지...  설명 좀 해보란 말이에요!! 네?"


도사는 피곤하다는 듯 귀를 후벼 파며 말한다.


"아오 아오 알았어 ~~ 닦달 좀 그만해.

너도 이쯤 되면 대충 눈치챌 거 아냐~?

2월에 내가 피어낸 장미.

그 장미의 아름다움을 너에게 깃들게 했다.  

물론.. 순간적인 건 아니고 영원한 것이지.

실은 네가 이 나이쯤 되었을 때 마땅히 너에게 생겨날 외모였다.

그러니..  여인의 아름다움을 꽃에 비유해서... 피어난다는 표현을 쓰잖아?

다만, 그 시기를 좀 앞당긴 만큼

또 오래된 기억 속의 어떤 사건을 해결해야 했지."


"오래된.... 어떤 사건?"


도사

"그래. 지금 너의 그 얼굴의 역사는 말이지..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그때의 네 모습 그대로인 거다.

네가 헤라에서 만난 그 선배들, 친구들 모두...

그 몇백 년 전 시대에 닿았던 인연들이지.

중학교 때 네 친구도... 문지석도.

너는 그 시대에 무용수로  위장한 채 살았던 자객이었다.

첩자였지."



N은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워졌다.

"아하...? 도사님 혹시.. 새 시나리오 쓰는 거 아니죠?

 거 참.. 재밌으니 계속 들어보죠."



도사

"너는 어릴 때 납치돼서 철저히 자객으로 키워진 아이였다.

여자애였는데도 신체가 유달리 날렵하고 훈련에 빨리 적응했지.

너는 조직의 에이스가 되었고

궁궐 안팎에서 활동하는 왕의 첩자로 양성되었다.

하지만 낮에는 마치 궁궐의 무용수인 듯 활동하며 정체를 숨겨야 했지.

왕이 너를 은밀히 불러 일을 시킬 때는 어여쁜 무용수 한 명을 침실에 들이는 것처럼

위장해서 너는 당당히 왕의 처소를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N

"뭘... 어떻게 되었냐니.....  무용수인 것처럼 살다가

왕과 밤을 보내는 듯 만나서 몰래 명령을 받고...

밤에는 다시 자객이 되어 누군가를 죽이러 다닌 건가요?"



도사

"보기엔 그렇지.  하지만... 너는 자객으로 사는 삶이 너무나 괴롭고 끔찍했다.

세상에 없는 존재인 듯 살아가다.. 어느 날 적의 손에 걸려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도

세상에 없는 존재로 사라지는 거였으니까.."


N

"비극적인 삶이네요... 누구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누군가를 죽이고 죽이다가...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삶.."


도사

"너는... 그래서 넌 차라리 한 명의 아름다운 무용수가 되어 살고 싶었다.

사람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으며 아름다운 여인으로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존재로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 졌지. 그리고 멀쩡한 남자와 가족을 이뤄 자식을 낳고..

너를 버린 부모와 달리 다정하고 멋진 부모가 되어 그 자식을 키우며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만 싶었지. 왕의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일은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이자 고통이었다."


N

"그랬군요.. 하긴..  매일이 지옥 같았을... 자객의 삶보단..

사랑받는 무용수가 더 좋아 보였겠네요.

그러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무용수인척 살았지만..

점점 진짜 무용수가 되고 싶었던 거군요."



도사

"그래... 너의 마음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지.

그걸 알게 된 너의 조직은 너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지."


N

" 왜요? 제가 잘 도망쳤나요?"



도사

"음.. 도망이라...

그러고 보니.. 제대로 도망을 간 거긴 하구나.

가장 가깝고 가장 안전한...  왕의 품으로 도망쳤으니 말이다."



N

"뭐라고요?!! 아니 이런 반전이... 왕의 여자가 된 건가요?

왕을 홀려서?? 거참.. 제가 전생에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였군요 하하핫"



도사

"지금은 웃지... 그때의 너는... 지독하고 절실했다.

네가 왕을 홀린 건 아니었다.

이미 왕이 너를 자객으로 부리면서도

너의 춤에 마음이 빼앗긴 지 오래였거든..

왕은 너를 보호해 주는 대신 자신의 여자가 되라고 했다.

너는 살아남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

돌이킬 수 없는 원한과 악연은... 그 선택 이후부터였다.  

왕후는 적에게 독살된 지 오래되어 왕은 이미 혼자나 마찬가지였지만..

왕에겐 후궁이 한 명 있었다.

세도가를 잡아두기 위한 정략혼인이었지만

그 후궁은.. 야망이 애정으로 변한 건지.. 정말 왕의 마음을 온전히 독점하고 싶어 했지.

독보적인 사랑을 혼자만 받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갑자기 왕의 여자가 되었고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자리 잡은 거야.

그 후궁은 죽는 순간까지 너를 저주하며 살았다.

그 후로 단 하룻밤도 자신을 찾지 않는 왕을 기다리며.. 너를 처절하게 저주하며..

그렇게 자식 한 명도 생산하지 못하고 뒷방 버림받은 후궁이 되어 홀로 죽어갔지."


정적이 흘렀다.


N

"그럼...  그 별것도 아닌 오해로 나를 버린 그 친구가... 강수영...

나를 좋아한 문지석도...  그때의 인연이란 거네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 거군요."


도사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그게 악연이든 선연이든."


N

"그렇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나요?

몇 년 전 타이타닉호로 돌아가 엄마의 선택을 바꾼 것처럼..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나요?

좋아요! 가보죠!

1년 넘게 헤라에서 그 훈련을 하고 춤을 춘 게  다~~ 그 기구한 사연 때문이라니...

저는 뭐.. 이미 준비가 되었어요!"


도사

"김칫국을 많이 마셨네?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어. 너는 이미 큰 것을 잃었거든.

몇 백 년 전 너의 그 외모를 다시 찾은 대신.... 거래가 성사되었지."



N

"... 네? 그럼... 제가 잃은 건 혹시..."



도사

"그래. 너무나 당연해서 모두들 잊고 살다가 잃은 후에 절실하게 찾게 되는 것.

바로 건강.

궁에서 누군가 너로 인해 비참하게 죽어갔다. 원한에 사무친 채 말이다.

네가 알았든 알지 못했던 그건 중요하지 않아.

사람의 감정에너지는 이 우주를 뒤바꿀 만큼 가장 강력하다. 소멸되지 않지.

사건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아.

누군가가 무언가로 인해...  상처를 받은 그 사실만이 남을 뿐이다.

너는... 여자로서의 건강에 큰 상흔을 얻었다.

내가 영원히 보호할 테니 앞으로 큰 수술을 할 일은 더 없겠지만...

그 후궁의 비참한 감정에너지가 니 수술대를 덮쳤다면..

너는 수술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 자궁 한쪽을 완전히 잃었을 거야.

N... 이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임신이 쉽지는 않을 거야.

물론 앞으로 계속 과거를 재설계해나간다면 다시 처음의 건강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긴 여정이 되겠지.

너는 몇 년에 한 번은 꼭 병원에 와서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해야 하고

때론 두려움을 겪겠지.

그리고 몸에 좋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일찍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일궈서

젊고 어린 엄마로 자식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세계는 멀어졌지.

혹시 그걸 바랐나?"



N은 편안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미 난 도사님을 만나지 오래예요. 초딩때부터죠.

이런 제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겠어요?

일찍 결혼하고 일찍 아기 낳고... 그 애가 자라도 젊고 예쁜 엄마라서

즐겁게 친구처럼 지내는 거.. 좋죠.  

엄마한테 지독한 사춘기 지랄병을 떨면서도.. 사실 그러길 바란 적도 많았죠.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거 깨끗이 포기합니다.

그 대신 저는 더 큰 사람이 되려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일찍 결혼하지 못한다 해도..

그런 사람이 제 인생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걸로... 감사할 거예요."



도사

"그래.. 그 시대로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겠구나.

너의 운명을 바꾸자면...  네가 자객으로 키워지기 전에

너를 버린 부모의 운명부터 다시 재설계해야 할 테고..

그렇다면 이 우주가 몇 번을 블랙홀에서 회오리를 쳐야겠지.

어우... 생각만 해도 뒤처리가 피곤하다.

아~~ 주 훌륭한 선택이다! "


도사가 박수를 짝짝 친다.


N은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늘어진다.

"아우~ 너무 많은 얘기를 했어요...

 엄청난 사연을 듣고 보니.. 심하게 피곤하네요 ~~

좀 자야겠어요...

대신 저한테 주시는 선물로 저 장미꽃 향기가 여기 가득~ 차게 좀 해주세요.

향이 너~무 ~ 좋으니까요..."


도사

"그 정도야 뭐."



도사는 풀쩍 날아올라 장미꽃 위로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

붉은 장미꽃에서 반짝이는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N의 병실을

빙빙 돌며 빛을 가득 채우고 또 채운다.


병실 안에 붉은 생장미의 화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N은

병실에서의 남은 몇 달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10월에 돌아갈 학교에서의 평온한 나날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빠졌다.  


- 끝 -




- 5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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