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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Sep 07. 2024

엄마의 과거부터 다시 설계하다.

타이타닉 배에서 뒤바뀐 운명.


온 친척이 다 모인 추석 대명절.

N의 집에서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지켜보았을 하얀 난꽃은 목이 꺾여 떨어졌다.  

아빠의 손에서 날아간 화분은 절망적 이게도 엄마의 머리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진갈색의 파마머리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엄마는 화분이 깨지면서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한참 어린 동서가 그 난리 중에 119에 전화를 한 것 같았다.

 

그 후 -

머리를 꿰매고 약을 먹고 응급 치료만 받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문득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엄마의 시어머니와 모든 아빠의 혈육들을 모아놓고

영원한 이별을 선포했다.

N이 10년 넘게 봐온 엄마와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자신의 삶과 자식의 운명을 보호하고자 작지만 거대한 용기로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엄마의 죽을 뻔한 희생을 기점으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N과 오빠와 언니도 모두 각자의 부모를 선택해 따흩어지게 되었다. 


N은

더 어린 시절 흐릿한 기억 한 줌이 떠올랐다.

놀이동산의 커다란 귀신의 집에서 혼자 길을 잃었다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겨우 통로의 화살표를 보고 뛰쳐나와

환한 바깥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순간.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N의 엄마는 아빠와의 위태로운 협상 끝에 겨우 6천만 원의 재산을 분할받았고

그 동네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은 골목에 이제 금방 다 지어지려 했던 미완공 빌라를

급하게 분양받았다.

둘이 살기에 그저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은 17평의 빌라.

분양가는 6800만 원이었는데 돈이 부족했던 엄마는 절대 빚을 지고는 살 수 없다며

은행 대출은 알아보지도 않았고

빌라를 짓던 건물 사장아저씨에게 부탁을 거듭하여 나머지 잔금 800만 원을

살면서 조금씩 갚기로 했다.


그렇게

집이라는 공간과 환경이 송두리째 격변했다.

매일 두려움 속에 견디던 N의 밤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지옥문이 하나 열렸으니..

그것은 바로

14살 N의 악랄한 사춘기 지랄병이었다.

이제 막 가슴이 급격히 자라서 브래지어를 사고 성교육도 받기 시작하 나이에

엄마는 800만 원을 천천히 납부하도록 배려해 준 그 빌라의 사장과 인부를

집에 수시로 초대하여 푸지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크지도 않은 거실에 인부 아저씨들이 몰려와 한 달에 한 번은 저녁을 먹고 퇴근했는데

N은 그 시간이 지독하게도 불편하고 깨림칙했다.

더 이상 아빠 같은 비슷한 부류의 남자가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집안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괴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남편 없이 홀로 막내딸을 키우며 삶을 이어나가야 했던 엄마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어렵게 작은 회사의 사내식당에서 조리원으로 일을 구했다.

엄마가 어렸던 그 시절에 여자는 많이 배우지 않는다며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조금 유복했던 시골 감나무 부잣집에서 청춘을 즐기며 성장한 후  

어느 날 돈 잘 벌어다 주는 신랑감을 찾아서 평범하게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고 살아간다면 이번 생은 나름 잘살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그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런데 엄마의 그 팔자가 이렇게 사나울 줄이야.


하지만 엄마는 그로부터 마음에 욕망이 자라난 것일까.  

그 세월 험악한 남편과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밑에서 마음고생하며

독기만 늘었는데

꼴이 이렇게 되다 보니  

엄마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N에게 투영시켰다.  

그것은 N이 보란 듯이 성공해서 돈 많고 잘난 남자와 결혼도 해서

엄마의 억울한 고생과 대접받지 못한 울분을 보상받고 싶어 했다.

  

'서글픈 내 인생의 이루지 못한 꿈... 내 딸아... 네가 그것을 대신 이뤄라. 알겠나?'



N의 아빠도 아주 복잡한 집안의 내력 속에 나름대로 사연 있는 남자이긴 했다.

독보적인 특허를 취득한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경남의 이름 있는 회사를 대대로 물려받기 위해

9살의 나이에 그 집안의 양자로 입양되어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20대 때 처음 사귄 여자와 첫 결혼을 했지만

N의 배다른 오빠와 언니를 낳은 후 이혼을 한 첫 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N의 엄마는 이미 애가 둘이나 있는 이혼남과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남자가 나중에 당연하게 회사를 이어받을 테니 그 후엔 엄마도 떵떵거리며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란

예측이 남편감을 선택하는데 큰 결정을 했다.

게다가 그 남자는 젊은 시절 그 대단한 자존심과 똑똑한 머리로 고시에도 합격했지만

세무서에 취직해서 지방 대표 세무관이 되는 특급 승진을 이뤘다.

탄탄대로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엔 당연하게 그 회사를 물려받아 회장님 소리를 들으며 살 예정이었다.  


하지만, 술과 담배를 즐기던 아빠는 어느 날 그 대단한 집안의 다른 두 번째 아들에게 회사를 빼앗기게 되었고

겨우 이름 모를 무역 회사의 대리로 밀려났다.   

아빠는 완전한 술괴물이 되어 인생을 한탄하며 살았고

그 빼앗긴 성공에 대한 집착과 분노와 원망을

허구한 날 잔소리를 해대는 엄마를 향해 풀어댔다.   


아이들은 어른이 아이를 붙잡고 세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티브이 속 주말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단란하고 평화롭고 서로에게 친절한

부부와 가족의 모습이 N에게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 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수도 없이

'왜'라는 질문을 허공에 던져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외롭고 서글퍼 보였고

그렇게 공포스럽고 미웠던 아빠도 때로는 비참하고 괴로워 보였다.


그렇게 혼자 생계를 짊어지고 일터로 나가데 된 N의 엄마는

학교 성적이 늘 평균 아래를 맴도는 N을 붙잡고 긴 잔소리와 함께 엄마의 실패한 꿈을 주입시키곤 했다.

 

"N아.. 니 성적 이래 가지고 되겠나? 어?

엄마 니 하나 키울라고 이래 고생을 하는데...

니가 공부를 잘해야 좋은 고등학교 가고 좋은 대학교 가고 좋은 회사 취직해서

좋은 남편 만나서 우리가 잘살아야 느그 아빠도 후회하지.

그라고 저 집안도 우리한테 관심을 보이는기다! 알겠나?"

 

왜 인생을 열심히 살고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어야 했을까.

누군가의 후회를 바라고, 누군가의 패배감을 바라고

누군가로부터의 인정과 대접을 바라는 것일까..

N은 엄마에게서 그런 정신 교육을 받을 때마다

심장에 있는 물기가 점점 말라서 쪼그라드는 것 같은 압력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렇게 N은 엄마에게 점점 날이 선채 차갑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지독한 사춘기였다.


그렇게

2002년이 찾아왔다.

3월이 되어 이제 새롭게 교복을 입는 중학생이 되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쯤 가면

나오는 그 지역의 삼도중학교 신입생.

 

1학년 4반.

이제 교복을 입고 어느덧 키도 부쩍 자라 청소년 티가 나기 시작한 N은 특유의 분위기가 생겼다.

뭔가 그 또래들에 비해 어른스럽고 지극히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왠지 모르게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 쏠리는 묘한 분위기.


그래서인지 N은 소수의 친구와 빠른 시간 내에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최다미와 강수영이었다.


다미의 부모님은 그 동네에서 회원수가 가장 많은

종합 내신 학원의 원장선생님 부부였고  

다미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공부는 월등히 잘해

어디서든 전교 1~5등 안에서 돌았다.


강수영도 항상 중상위권을 벗어나지 않는 성적에,

얼굴 또한 서구적이게 또렷한 이목구비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고  

수영의 집은 꽤 멀리 떨어진 해운대 신도시였는데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바닷가에 부모님의 요트가 2대나 있고

80평이 넘는 고층 아파트에 살며 좋은 차도 2대나 있는 전형적인 부잣집 딸내미였다.


이혼 가정에 외벌이 엄마와 함께 작은 빌라에 살면서

성적도 그다지 특출 나지 않았던 평범한 N은 그런 아이 둘과 친구가 되었다.

 

셋은 워낙 잘 어울려 다녀서 중학교 내에선 SES라 불리며 꽤나 유명한 그룹이 되었다.

가끔 다른 아이들은 그 셋에 끼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 반대로

왜 최다미와 강수영에 비해 집안도 성적도 떨어지는 N이

저들과 친구인지 질투를 하기도 했다.


N은 그다지 다른 애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끔은 그런 시기 어린 말을 들으며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도 중학교의 SES로서 친구가 좋았고 학교 생활은 꽤 즐거웠다.

이제 막 성교육을 받으며 호기심에 눈을 뜬 남자애들의 유치 찬란한 장난을 웃어넘겼고

용돈을 모아 시내에 가서 극장도 가고 다 같이 눈을 질끈 감고 귀도 뚫고

노래방을 가서 신나게 뛰어놀다가 집으로 오면 대충 숙제를 하고 공부 좀 하다가

엄마의 잔소리를 조금 견디고 다시 티브이를 보며 즐거워하며 잠이 드는 일상이었다.

더 이상 N의 인생에 매일 밤 공포로 짓눌리는 두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시원한 날들이 흐르던 중

하도 중학교 운동장에 정자가 하나 세워졌다.

선생님들이 운동장에 애들 노는 거 보면서 쉴 그늘이 없다고 하여

교장선생님이 제대로 된 정자를 하나 짓기로 해서 지어졌다는데

그 정자의 옆엔 아름드리 등나무꽃도 한그루 심어졌다.

 

그 등나무는 이미 덩치가 큰 채로 이 학교로 와서

옮겨 심어졌기에 꽃의 봉오리들이 맺히고 보랏빛 등나무 꽃이 만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걸어가던 어느 날.

 

그 등나무 꽃잎들이 시원한 바람에 사락사락 날리며 정자 위에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애들이 하교해서 운동장도 텅텅 비어있던 시간.


N은 문득 그날 리를 꽃비속에 흠뻑 빠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그 정자 위에 책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올라가 큰 대자로 양팔과 다리를 뻗고 벌러덩 누웠다.


N의 몸 위에 흩날리며 떨어진 등나무 꽃잎의 부드럽고 알싸한 향기에

퍽 기분이 좋았다.



바로 그때.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이 순식간에 열린 듯 한줄기 노란빛이 나무 사이로 뻗쳐 내렸다. 


N이 외친다.


"달빛 도사님!"



달빛 도사의 음성이 꽃잎 속에서 들려온다.


"N. 오랜만이구나.

키가 너무 자라서 몰라볼 뻔했어."


N은 벌떡 일어나 앉는다.


달빛 도사의 목소리가 그리도 반가울 줄이야.

어디서 들리는 거지?


다시 들리는 반가운 음성.

 

"나 여기. 여기."


N이 정자에서 튀어나와

위를 올려다보니 등나무의 가장 굵은 나뭇가지 위에

역시나 까만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쪼그마한 몸으로 서서 미소 짓는 달빛 도사가 있다.


"달빛 도사님 ~!

역시... 맞네...

갑자기 등나무 꽃이 심어졌길래요...

달빛도사님 생각이 났거든요!

저 만나러 온 거 맞죠?"


달빛 도사는 공중에서 도포를 휘날리며 한 바퀴 돌더니

N의 눈앞에 착지한다.  


"그 후로~ 시간이 또 흘렀구나.

물론 너의 세계에서 말이지..

나의 세계에선 뭐... 복숭아로 담근 향긋한 술을 한두 잔쯤 따라 마시면 끝나는 시간이지만."


N은 오랜만에 등장한 달빛 도사가 너무나 반가웠다.

큰 걱정 없이 무난하고 즐거운 일상 속에서 간혹 그 신비한 존재가 정말

자신의 첫 번째 소원을 이뤄준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네? 뭐라구요? 그때는 저 초딩때였고...

지금 저는 중학생이예요!

달빛 도사님 만난 후에 시간이 엄청 지났는데요?"


달빛도사는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아 그러니까...!

그건 니 세계의 시간이고!

나는 잠깐 일처리를 하고 복숭아주(酒)를 두 잔쯤 들이키고 나니

또 니 목소리가 들리기에... 내려왔을 뿐이다.

위에선 도대체.. 나더러 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여간 이놈의 신의 세계는 휴식시간이 없어...

도사휴가추진위원회에 항의를 하던가 해야지 원..."


N은 퍽 웃기고 신기한 달빛 도사의 세계를 다 이해할 순 없지만

그저 좋았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구요?"



달빛 도사


 "그래그래에....  우리가 어쩌다 운명의 줄로 엮여서..

네가 강하게 내뿜은 기운들이 다 나에게 전해진단다... 번개가 치듯 치지직~ 거리면서 말이다~~"



"와...  정말요?

그런데... 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요즘은 그냥... 엄마 때문에 좀 힘이 들어요.

겨우 아빠한테 벗어나서 사는 게 재밌기도 했는데 말이죠...

내 친구들은 멋있어요.. 나는 SES에 바다 담당이에요!

애들이랑 노래방 가면 노래도 잘하는 내가 항상 바다 파트를 불러요! 히히

근데 아무튼.... 엄마가 나한테 하는 말들이 너무너무 힘들어요.

우리 엄마는 왜 이런 인생을 살았던 거예요?

나도 엄마가 나 때문에 희생하고 힘들어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해요 제발."


잠깐 이었지만

누가 봐도 애어른 같은 N을 뭔가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달빛도사는 다시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어떤 정해진 때가 되면 말이야..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뭔가를 떠올리게 되고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한다.

그들의 상상이고 , 생각이고,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말이야...

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이 세계의 설계도에 따라 순서대로 일이 진행되는 거란다.  

아 그리고....!   맞아.

바로 오늘 밤이군?

네가 좋아하는 그 까만색 네모상자. 티브이를 켜라.

그리고 22번 채널을 봐.

그럼 너의 어머니와 너의 전생사 인연을 알 수 있을 테니.

시간이.. 몇 시더라...   정확히 밤 10시에 시작한다."



N

"오늘 밤 10시... 티브이를 보라구요? 뭐가 나오는데요?"


N의 호기심 폭발하는 눈빛은 쳐다도 안 보고

달빛 도사는 혼자 뭔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혼잣말을 중얼중얼한다.


"후훗.. 내가 달노인에게 시나리오 쓰는 법은 제대로 배웠지.

너와 어머니의 전생사 인연을 보는 게... 괴로우려나? 비극은 괴로우니까...

하지만.. 아냐 아냐... 모든 것은 큰 세계에서 한 낯 웃음거리일 뿐이니...

꽤나 재밌을지도 모르지~?"



-



그날 밤. 정확히 10시.

엄마는 야간 근무를 가는 날이라

늦은 밤 N은 혼자 늦게까지 티브이를 볼 수 있었다.

안 그러면 밤 12시가 넘는 순간 빨리 티비 끄고 자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있었을 텐데

한 달에 한번 야간 근무를 할까 말까 하는 엄마의 스케줄이 그날 갑자기

야간으로 잡힌 것이다.


정확히 22번 채널을 튼다.


어떤 영화가 시작하는 것 같은데..

영어로 된 제목이 보인다.


<Titanic>


이어서 한글 자막이 뜨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타이타닉>


이 영화 제목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초딩시절 오빠와 언니가 지하철을 타고 영화관에 가서 보고 왔다는

그 유명하다는 영화의 제목이었다.


티브이에서 다시 방영해 주는 것일까?

내용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그 영화.

 

달빛 도사는 분명 밤 10시에 22번 채널을 틀면 보일 거라 했는데

그가 보일 거라고 했던 이야기는

N의 엄마와 자신의 전생사 인연이라고 했는데

이게 웬 영화인지 N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당장 달빛도사를 만날 수도 없었기에

N은 괜히 한번 볼멘소리를 공중에 던져보고

가만히 영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N

"달빛도사님... 저 영화가 진짜 우리 엄마랑 내 인연을 보여주는 건가요?

참.. 알 수가 없네.. 뭐 일단 보라 했으니 봐볼게요."


거실 창 밖에는 차가운 벽돌로 된 빌라촌 골목길이 보일 뿐이었다.

아무도 그 골목길에서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등나무 꽃잎이 유리창 밖에서 아른아른 흩날렸다.


잠시 후 -  

새벽 1시가 지난 시간.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다.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N은 뭔가에 홀리듯

영화 속 세계에 빠져들었다.


째깍째깍.

N이 영화를 보는 3시간 동안

달빛 도사의 우주는 3초간 운행을 멈춘다.


다시 과거로 펼쳐진 시공간의 홀리 거꾸로 돌아간다.


-


N은 한 장면 한 장면을 사진을 찍듯 기억해 냈다.


"진짜..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여자 주인공이... 로즈... 근데 로즈 엄마가... 왜 우리 엄마랑 비슷하게 생긴 거야??!

그럼... 엄마랑 내가.. 전생에도 똑같이 엄마랑 딸이었다는 소리야?

저 로즈엄마처럼... 로즈가 부잣집 저 나쁜 놈한테 시집가길 바란 것도 똑같네?

아니 그러면.. 내가... 저 여주인공이라는 건가? 크크크"


N은 엄마와의 전생사를 알게 되어 뭔가 해답을 찾았나.. 했지만

신기하거나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막연했다.


'뭐야...?' 


N은 다음 날 등나무꽃이 피어있던 정자로 다시 찾아간다.

달빛도사를 부를 필요조차 없었다.


휘날리는 등나무 꽃 아래에

이미 달빛도사가 드러누워 코까지 그르렁 거리며 잠에 취해있었다.


N

"저기요!! 저기요! 도사님!!

일어나 봐요!"


침을 흘리며 자다가 벌쩍 일어나 앉는 도사.

"어.  N. 왔어?"


N은 따지듯 묻는다.

"로즈 엄마예요? 우리 엄마가? 내가 그 여주인공?로~즈?"



달빛 도사는 심히 황당해했다.


"너...  착각도 병이라는 말 들어봤니?"


N

"에.. 그럼 아니에요?"



달빛 도사

"응 아냐.

배가 두 동강이 나서 바다로 가라앉을 때

탑승 인원에 제한이 있는 구명보트를 타는 장면 기억나니?"


N

"그럼요! 그때부터 완전 하이라이트인데요!"


달빛도사

"자. 그 장면 중 지금 누가 떠오르지?"


N

"어... 누가 떠오르냐면...

아! 갑자기... 그 여자가 생각나요.

낡고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여자요.

갓난아이를 데리고 타이타닉호에 탔죠.

그 배의 럭셔리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애기를 놔둘 방도 없고... 자리도 없어서

애를 들춰엎고선 계속 설거지와 음식쓰레기 뒤처리 일을 하던 가난뱅이 여자..

그 여자가 마지막에

구명보트에 부자들만 먼저 태운다고 해서

부자의 객실에 몰래 들어가죠. "


도사

"그렇지. 그리고는?"


N

"부잣집 아줌마의 드레스를 한벌 훔쳐서 나오다가...

걸렸어요.  

하지만... 부잣집 여자로 보이지 않으면 애기를 데리고 구명보트에 탈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 여자는 자신을 발각한 그 주인 여자를 밀쳐내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결국 붙잡혀서 그 드레스를 빼앗기게 됐고..

홧김에 머리 자르는 가위로 부잣집 여자의 손목을 긁고 도망쳐버렸어요.

그렇게 다시 훔친 그 드레스를 몰래 입고선

숨겨둔 아기를 찾아 들춰안고...  결국 부잣집 귀부인 인 첫 하고 구명보트에 타죠.

타이타닉에서 살아난 거죠? 좀 나쁜 방법으로.... "


도사

"이제 알겠니?"


N

"뭘.. 말이에요?"



도사

"자신에게 맞지 않는 타인의 옷을 빼앗아 입고...  살아났다.

타인의 운명을 훔친 거나 마찬가지야.

그 가난한 여자는 자신과 아이가 살기 위해서

부잣집 귀부인을 다치게 했지.

그 귀부인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

피를 흘리다가 기절을 하고 결국 물에 잠겨 죽었어.

목숨을 바꿔치기한 거지.

사람 인생은 말이야... 순간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뒤바뀐다.  

그 후... 뒷이야기를 해주자면..

살아난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을 취재하던 기자가 있었다.  

그 가난한 여자는 그 기자에게 사진이 찍혔지.  

물에 젖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부잣집 여인이

남편은 죽고 갓난아이와 함께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 후 그 여인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

그 여인은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가짜 드레스옷을 입고, 가짜 부잣집 여인 행세를 했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의도는 없었다 해도 말이야.  

신문에 실린 여자의 사진을 보고 어떤 돈 많은 백작의 아들이 청혼을 했다.

그리고 그 가난했던 여자는 정말 부잣집 백작 부인이 되어 살았지.

자신의 아이도 처음부터 부잣집 딸인 듯이... 잘 키웠어."



N

".... 도사님... 설마...!"



도사

"그래.

그 가난한 여인이... 너의 어머니다.

처음엔 갓난아기인 너를 살리기 위해서

생각한 방법이었겠지.

하지만 말이야...

사람의 마음은 여러 단계로 아주 긴밀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단다.

그래서 사실 인간들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제대로 알 수가 없어.

그저 내 생각이 그렇다고, 내 마음이 그렇다고 선택하고 믿을 뿐이야.

이기적인 마음의 밑바닥은 오히려 이타심으로 가득 차있기도 하고, 반대로  

누가 봐도 이타적인 마음의 밑바닥이 오히려 지독한 이기심이기도 해..

하지만 인간들은 스스로를 모른다.

너의 어머니는... 너를 살린다는 마음의 바탕아래

자신도 함께 아주 잘 살고 싶었던 거야.

실은 그게 빙산의 숨은 본체처럼 더 컸을지도 모르지.

너를 방패 삼아 어머니는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가짜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진짜인 듯 행세하는 거야."


-


달빛도사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엄마의 전생은 씁쓸한 거짓으로 화려하게 점철되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난 갓난아이... 그렇게 엮인 모녀같이 인연이라니

기억도 없는 다른 세계의 행적에서 N은 죄책감을 느꼈다.


N

"그렇군요...  하긴..  영화를 보면서도...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그 가난한 여자.. 아니... 우리 엄마...  

결국 누군가를 죽이고 빼앗아서 그 운명을 훔쳐간 거네요. 그렇죠...?"



도사

"그렇지.

너의 어머니는 그 생에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백작부인으로 부귀하게 살다 죽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생부터였지.

너의 어머니의 죄업은 절대 이 세계에서 소멸되지 않아.

다른 형태로 존재하다가 다른 시간의 세계 속에서 다시 본인에게 돌아올 뿐이다.

그다음 생에 너의 어머니는 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부잣집 아들을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임신하지.

그리고... 아이를 놓은 후, 그 부잣집에 아이만 빼앗긴 채 처참하게 버려진다.

그리고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살해당하지.

그리고 그다음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났다.

하지만 자신의 하녀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재산도 신분도 모두 빼앗긴 채

다시 쫓겨나 거리의 부랑자로 살다가 온갖 험한 일을 당하고 죽음을 맞지..

그렇게 끊임없이 비슷한 생이 반복된다."


N

"... 정말 비참하네요...

이렇게 비참한 사실을 알려주려고 오신 건가요? "



도사

"그렇다면 내가 뭐 하러 나타났겠니."



N

"방법이 있나요?"



도사

"과거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네가 잠시 너의 어머니의 전생으로 돌아가

그 악연의 시작이 되는 사건의 결과를 바꿔라."


N

"내가.. 돌아가서 바꿔요?

그건 엄마의 선택이었는데 내가 무슨 수로요?"



도사

"그때의 시간 차원으로 돌려줄 것이다.

너는 어떤 존재가 되어 그 시공간에서 너의 어머니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바꾸도록 만들 수 있겠지."


N

"어떻게요?"


도사

".... 어떻게라니?

내가 니 과거 설계까지 다 해주랴?

그건 이제 너의 선택에 달린 것이지.

자!  시간 없다 빨리 가!"



순간 잔잔하던 정자에 돌풍이 불어 닥쳤다.

운동장에서 모래바람이 용트림처럼 일어나고

등나무 꽃잎이 바람에 거세게 휘몰아치며 N의 얼굴을 따갑게 스쳐간다.  


-


다시

1912년. 겨울. 타이타닉.



N은 부지런히 바이올린 활을 쥔 손을 움직이고 있다.

바이올린을 부지런히 켜고 있는 것이다.  

배 위의 악사가 되어 연주를 하는 N.

바이올린이라곤 생전 잡아본 적도 없는데

능수능란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게 이상하다.

음악의 선율은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초등학생 때 음악시간에 배웠던 모차르트인지 베토벤인지 누군가의 클래식인 것 같다.

그런데 배 위의 풍경은 평화와의 한참 거리가 멀다.

배는 이미 기울어가기 시작했고

갑판 위의 사람들은 카오스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짐가방을 들고, 혹은 짐이란 짐은 다 바다에 던져버리고

몇 대 없는 구명보트에 오르려고 아우성이었다.


N

'왠.. 악사 콘셉트이냐.

그나저나... 가난한 여자... 갓난아기를 안은...

그러니까 전생의 나를 안고 있는... 우리 엄마는 어디..'


라고 찾아보려고 바이올린을 멈춘 채 일어나려는 순간.

옆의 뚱뚱한 첼리스트가 나를 붙잡는다.


"자네, 그만할 건가?

우리도 보트에 올라야겠지?"



N

"아...  그래야겠지? 나는 찾을 사람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네.

자네도... 얼른 살길을 찾아가게."



첼리스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을 한다.

"그래야겠지.. 나도...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딸이 있다네."


첼리스트와 모든 악사들이 덩달아 연주를 그만두고

악기를 챙기기 시작한다.


N은 서둘러 엄마를 찾으러 움직인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부잣집 아줌마의 객실을 찾아 나선다.


'분명히... 특등칸 중간쯤..이었는데...

아 저기 같다!'


특등칸 객실 방문에는 작은 금색 글씨가 박혀있었다.

Mrs. Lauren.


N은 고민할 것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아직 방에는 아무도 없다.

N은 옷장문을 연다.


아니나 다를까

가난한 여인이 훔쳐갈 부잣집 아줌마의 드레스가 걸려있다.


'아직 엄마가 오기 전이구나.'


N은 그 드레스를 꺼내서

급히 방을 나가려는데

순간 누군가 문을 조심히 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옷장 뒤로 숨는다.


몰래 지켜보니... 가난한 여인이었다.

아기를 어딘가 숨겨놓고 드레스를 훔치러 온 게 분명했다.


가난한 여인, 옷장 문을 황급히 열어보지만.. 드레스는커녕 아무것도 없다.

실망한 기색의 여인이 얕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포기했는지 주변을 살펴보다가 객실을 빠져나간다.


N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시 드레스를 옷장에 걸어둔 채 객실을 빠져나온다.


N은 여인의 뒤를 쫓는다.

여인은 숨겨둔 아기를 찾아서 다시 품에 안고

구명보트를 타는 곳으로 간다.


여인은 계속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밀쳐진다.


N이 안타깝게 바라본다

'엄마... 이 운명의 시작이... 어떻게 될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어디선가 애잔한 첼로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그곳을 쳐다보니

아까 살길을 찾아 떠난다던 뚱보 첼리스트가 다시 혼자 의자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다.



'응? 내가 본 장면엔.. 악사들이 악기까지 다 들고 배에 타려다가 배가 아작 나서 바다에 빠졌었는데..'



N은 가만히 그 첼로선율을 듣는다.


눈앞엔 저마다 먼저 보트에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말로가 눈에 보였다.


'인간의 운명이란...'


N은 생각했다.


'엄마의 죄는... 그 드레스에서 시작됐어.

그러니 이제 거기선 벗어난 거야.

그럼 됐어. 이젠 엄마도 저 아기도... 그러니까 나도... 정해진 흐름대로.. 살아가겠지.

부잣집 부인과 딸로 사는 건 이번 생에 포기하겠지만... 죄는 짓지 않는 거야.

그래.. 이걸로 됐어.

그냥 매 순간... 이걸로 된 거야. 뭘 얼마나 더 살길... 풍요롭길 바라겠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 가능한 거라면.. 아무것도 뺏지 않고.... 그저 지금을 살겠어..'



N은 불쑥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용기와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음속에서 물결처럼 번지는 편안함이 N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N은 여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기... 예쁜 아기와 어머니?"


여인은 깜짝 놀라서 N을 쳐다본다.

여인은 가난에 찌들어 푹 페인 볼에

깊이 들어간 쌍커품, 희망이 없는 눈빛이었다.


지금의 N이 엄마와는 사뭇 다른 나약한 여인의 모습.


N은 온화한 미소로 여인에게 권유한다.


"당신과 이 아기의 운명은.. 정해진 대로 잘.. 흐를 겁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절망에 살지 말고...

잠시.. 음악이 주는 선물을 받아보시겠어요?

이리 오세요!"


N은 조심스레 여인을 첼리스트 앞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싱긋 웃음을 보이며

첼리스트 옆에 놓아둔 자신의 바이올린을 켠다.


첼리스트는 돌아온 동료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N

"자네, 보트에 올라야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도시에 혼자남을 아내와 딸은 어쩌고.."



첼리스트

"그래... 아내와 딸이 지금도 너무 그립다네..

하지만 말이야.  내가 워낙 뚱뚱해야지 말일세.

내가 저 보트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간

저 가녀린 여인과 아이들 몇 명은 타지 못할 수도 있지 않나.

한 사람 몫이라도 덜어야지.

내 아내와 딸도 지금의 이런 아빠를 더 존경해주지 않겠어?

편지도 쓸 수가 없으니.. 그저 이 음악을 들으며 보트를 타고 살아난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전해주면 참 좋겠네..."



N

"그래. 우리 함께하세.

저 아기를 안고 있는 저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한곡 켜볼까?"



첼리스트

"디베르티멘토 제17번 D장조 3악장 미뉴에트!"


N와 첼리스트의 연주가 시작된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여인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음악을 듣는다.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그때 보트 위 기사가 급히 소리를 친다!


"자리가 다 찼소!

어린 아이나 아기가 있다면 태울 수 있소!"


여인은 황급히 보트로 달려간다.

"please..."


보트기사는 얼른 갓난아이를 데려와 품에 안고

보트에 올라타있는 한 귀부인에게 아기를 안겨준다.



"자, 여기 아기를 좀 부탁하오."


보트에 타 있는 그 여인은

N이 걸어둔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었다.

 

상기되어 긴장한 표정이지만 앉은 자세와 고개만은 기품을 잃지 않는 모습.

귀부인 그 자체였다.


귀부인은 아기를 품에 안고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예쁜 아가씨군요."


보트기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가난한 여인을 바라보다가

이미 너무 자리가 터질 듯 꽉 들어찬 보트를 보며 냉정한 표정을 짓는다.


"그... 미안하지만, 아주머닌 다른 보트를 알아보시오! 자리 없소!"


여인은 서글픈 표정으로 보트에서 물러난다.


기사의 함성과 함께

줄에 묶인 보트가 바다 위에 천천히 닻을 내린다.


귀부인의 품에 안긴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떨구는 여인.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다시 배가 휘청하고 가라앉기 시작한다.


여인은 다시 구명보트를 찾으러 갈까 하던 중..

눈앞의 다른 보트에서 가난한 사람을 밀쳐내고 부잣집 여인과 아이들을 먼저 태우는 모습을 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여인은 다시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는 N과 첼리스트의 앞으로 온다.

여인은 그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한다.

 

첼리스트는 여인에게 무언의 눈빛으로 동질감과 위로를 선물한다.

 

그리고 N은 저절로 움직이는 자신의 손과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선율에 심취한 채

여인을 바라본다.


'엄마...  그게 엄마의 선택인거지? 그래... 잘됐어.

이 배 위에서 이 생이 끝난다 해도...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살렸잖아...  고마워요 엄마... 우리 다음생에는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요.'



거대한 타이타닉의 가운데가 동강이 나면서

사람들의 비명은 더욱 거칠어졌다.


배가 너무 휘청거려 N과 첼리스트도 결국 연주를 멈췄다.


배가 차가운 바다 위로 가라앉았다.

N은 온몸에 한기가 들었고 두려움에 머리카락이 곧두섰다.


"아니.. 잠깐 만.. 달빛도사~~!!! 이러다 나 진짜 죽겠어~~

이거 진짜 과거로 돌아온 거 아니지?  아니라고 해야지~~!!!!"



N은 동강 난 타이타닉 호와 함께 차가운 바다에 던져졌다.

온몸에 한기가 들고 입술이 퍼레지며 추위에 덜덜 떨었다.

모든 살점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았다.


가난한 여인은 다행히 구명조끼를 얻어 입고 바다 위에 둥둥 떠있었다.


'으... 이러다 진짜 죽겠네... 뭐지... 과거를 다시 설계한다더니..

엄마가 살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죽는 건가? 응?'


점점 정신이 흐려지면서 허우적거리던 몸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음장이 실제로 둥둥 떠있는 바닷속 - 이미 죽은 시체들이 저마다 가라앉고 있다.


그중 영화에서 본 남자주인공 '잭'이 N의 옆으로 죽은 채 가라앉고 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잭이 눈꺼풀을 살짝 뜨는 듯 보였다.


'이 남자... 살 수 있는데.'


그 순간 바다 위에서 까만 도포를 입은 달빛 도사의 손이 물아래로 수- 욱 들어왔다.


달빛 도사


"N. 빨리! 내 손을 잡아라."


N은 힘껏 허우적거리며 도사의 손을 겨우 붙잡는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다..

더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잭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달빛도사, N을 바다 위로 대어처럼 당겨 올린다.


"어잌후 무거워라!"


N과 함께 잭이 바다 표면 위로 솟아오른다.

달빛 도사가 타고 온 갈색 고동색의 나룻배위로 힘겹게 올라탄다.



달빛 도사는 N이 손목을 붙잡고 온 잭을 황당하게 바라본다.


"아니... 이 남자는 뭐야?

너네 어머니 과거만 설계한다니까.. 다른 사람 과거까지 건드리면 어쩌자는 거야!!!"


꽥 소리를 지르는 도사에게 N은 겸연쩍은 표정을 한다.


"아니.. 그게... 이 남자... 추워서 기절한 거지.. 눈꺼풀이 움직였거든요?

아마 근육이 다 멈춰서 기절한 걸 텐데..

이 사람 살 수 있는데...

죽게 내버려 둬요? 응?!"



달빛 도사, 깊은 한숨을 쉬며 짜증을 낸다


"에라 모르겠다. 난 몰라! 네가 저지른 일이다! 응?

이미 네가 살려서 새로운 인연이 엮였다.

네가 책임져라. 응?"



N

"아유.. 참...   그러죠 뭐...  "


N은 잭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볼을 잡고 입술을 벌려서 숨을 불어넣는다.


달빛 도사

" 난 몰라.. 난 몰라..."



N

"후우- 후우- 후우-!"


몇 번의 호흡을 불어넣고 양손으로 잭의 가슴을 세게 압박하자

물을 토해내며 잭이 눈을 떴다.


"커억! 컥! 컥..."


깨어난 잭, 자신을 살려준 N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나타난 동양 얼굴의 여인.

잭은 멍하니 N을 바라본다.


달빛 도사, 손에서 등나무 꽃잎 몇 개를 훅~ 하고 분다.

타고 있던 나룻배 위 하늘에서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금세 나룻배가 바다 위로 붕 - 떠오른다.

그리고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다.


잭은 허공은 같이 몸이 붕 떠있다가 소용돌이에서 튕겨져서

다시 바다 위로 떨어지고

도사와 N은 시공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잭은 자신의 주변에 있던 시체의 구명조끼를 벗겨서 겨우 입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수영을 해서 근처에 있던 구명보트를 향해 헤엄을 친다.


-



까맣고 하얀빛이 공존하는 오색찬란한 은하수 터널을 지나는 도사와 N.


잠시 후 - 정자 아래에서 대자로 누운 채 눈을 번쩍 뜨는 N.

달빛 도사는 사라지고 없다.

정자 위엔 어디선가 흘린 물이 흥건하다.


"으읏 차가워...  바닷물까지 딸려온 거?

도사님~!!  갔어요?"


싸늘한 바람 소리 외엔 주변이 조용하다.


그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승용차 한 대가 정자 앞에 잠시 멈추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니 N 학급 담임선생님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쳐다본다.


"N아! 너 이렇게 추운데 왜 거기... 그러고 있니?

이 놈이 외투도 안 입고..

수돗가에서 놀다가 젖었니?

얼른 집에 들어가렴"


N은 얼떨떨하게 대답을 한다.


"아.. 네 선생님..  이제 집에 갈 거예요."


그제야 N은 문득 싸늘해진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싸늘한 초겨울의 바람이 뇌까지 뚫고 지나가는 듯 추웠다.

분명 가을이었는데 말이다.


"으... 추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자 위의 등나무 꽃이 하나도 피어있지 않은 것이다.


피어있기는커녕... 꽃봉오리조차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게 퍽 이상했다.


"그런데 선생님! 여기.. 등나무꽃이 왜... 없죠? 아까까지... 꽃잎이 막 휘날렸잖아요."


선생님은 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N아... 너 무슨 꿈꿨니? 등나무 꽃은 5월에 피는 거야..

지금은 9월이잖니... 무슨 꽃이 핀다고 그러니..? "



N, 다시 등나무를 쳐다본다.


'아..  그렇구나...

달빛 도사가 피워놓고...  사라졌구나. 또다시...'


선생님

"그나저나 N.  마침 아까 어머니가 전화 오셨다 ~

너 아직 집에 안 들어왔다고"



N

"네? 엄마가요? 그럴 리가.. 우리 엄마는 저녁까지 일하느라 바쁘고...

학교에 전화를 할 엄마가 아닌데요...?"



선생님

"어머니께 선생님이 인사드리긴 했지만... 항상 감사하다고 한번 더 전해드려라.

하여간.. 우리 N이 공부는 별로 안 하는데... 어머니는 참.. 뭐라고 닦달도 안 하시고...

니가 잘하는 적성만 잘 찾게 해 달라 하시니...  그렇게 좋은 어머니 별로 없다 ~~

집에 가서 엄마한테 잘해라~~ "



N은 만개했던 등나무꽃이 사실은 피어있지 않다는 사실과

다시 한번 운명이 바뀌고 달빛도사가 다시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선생님이 내뱉은 그 말이 더욱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선생님은 인사를 한 후 유유히 운전해서 교문을 빠져나갔다.


N은 요 며칠 체감하지 못했던 추운 날씨를 온몸으로 맞으며

집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엄마가 집에 있었다.

그리고 왠지 편안한 목소리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녁밥을 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식탁 위엔 N의 기말고사 성적표가 펼쳐져있다.

N은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엄마의 폭풍 잔소리와... 다시 불러 앉혀서... 공부를 잘해야... 아빠가 후회한다고..

그 집안이 다시 우릴 찾는다고... 그런 류의 주입식 감정을 받아낼 각오를 하려는데

엄마가 웬일로 성적표에 대해 아무 말도 없다.


"저녁 먹자~~

먹고 빨리 학원 가야지~ 오늘이 첫날이네?"


N은 물었다

"어.... 어?  무슨 학원?"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니 그렇게 바이올린 하고 싶다 해서 ~

학원 끊어달라며~ 그래서 엄마랑 같이 등록했잖아~

저녁 먹고 7시 시작이니까 엄마가 데려다줄게~ 빨리 밥이나 먹어라~"


한결 편안한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

식탁 위의 성적표는 더 이상 N의 운명에 감 놔라 배 놔라 터치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하고 싶다고...?'


N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거실에 티브이를 바라본다.

티브이 위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등나무 꽃잎 한 개가 사뿐히 얹어져 있다.



'달빛 도사님. 땡큐.'


-


N은 엄마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다.

문득 타이타닉 영화가 떠올라 엄마에게 묻는다.


"아, 엄마 타이타닉 봤나?"


"어- 그거 봤지."


"거기서... 가난한 여자 나오는 거 기억나나?

그 막 구명보트 타고 사람들 탈출할 때... 갓난아기 때문에

드레스 훔쳐 입고 보트에 탄 여자."


그런데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  그런 게 어디 있었니?

가난한 여자...? 애만 배에 태우고 그 여자도 어떻게 살았던 거 같은데?"



N이 오히려 갸우뚱했다.


"맞나...? 그럼... 그 악기 들고 보트 타려던 악사들은 기억나나?"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니 영화 제대로 본거 맞나? 악사들도 보트 타러 가려다가

첼로 켜는 남자가 자기 대신 다른 사람들 살린다고 혼자 연주했잖아~

이따가 바이올린 켜는 사람도 오고, 악사들 거의 다 와서 배에서 마지막까지 연주하고

니 타이타닉 본거 맞나? 다른 타이타닉 아니가? 하하"



N도 덩달아 황당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는다.

"하하하 그러게 ~ 내가 본 타이타닉은 짜가인가 봐~ "



N은 속으로 소리쳤다.


'이 세계에 몇 대의 타이타닉이 항해를 하고 있는 건지..

달빛 도사님 참... 대단해. 훗.'




- 2편. 끝 -




- 3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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