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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Sep 08. 2024

아름다운 얼굴 대신 치러야 할 대가는?

붉은 장미.

2004년 9월.

이제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


소녀, 학생, 청소년, 여성, 성장발육, 정체성, 진로, 꿈, 이성친구, 호기심, 베스트프렌즈, 반항, 소속감, 불안정

이때의 N은 이런 단어들이 저절로 나열되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친구들과 놀고 허황된 장난을 치고 때론 오버스럽고 극단적이면서 냉소적이고 웃음이 넘치고

애어른 같지만 교복을 입은 소녀.

그리고 미묘하게 소녀가 아닌 여자로 탈피 중인 어떤 과도기적 단계.

 

나중에 벌어질 일련의 사건을 말하기에 앞서

지금의 N이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조금은 다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키 158cm, 몸무게 57kg.  

성장호르몬 때문인지 늘어나는 식욕에 따라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랐는데

한 가지 이슈는 살이 오르는 곳이 배와 팔다리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그게 나름의 축복인지 모르고서

다른 여자애들에 비해 남다른 발육상태로 인해 착용하는 브래지어 사이즈가 시작부터 B컵이었다.  

체육시간에 뜀틀을 뛰거나 운동장 달리기를 할 때면

가끔 교실의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구경하고 하는데  

N은 뛸 때마다 유달리 출렁이는 가슴이 부끄러워 어깨를 푹 오그린 채 다녀야 했다.

이제 막 시작된 학교의 성교육 수업은 생각보다 적나라했고

한창 호기심 폭발하는 그 시기에 아이들은 모두 원숭이 소리를 내며 괜스레 비웃거나

장난스러운 태도로 수업에 임하다 된통 혼이 나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운동을 좀 하라며 엄마가 등록해 준 주말 수영 강습을 받기 위해 동네 수영장에 다닌 후로

키는 확실히 좀좀 커가고 있었지만  

통통하게 오른 살은 빠지지 않았고 운동 후 오히려 과식하는 습관만 들어버렸다.  


하지만 N은 뭐.. 그리 심각하게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몇몇 여자애들처럼 말라깽이가 되고 싶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랬던 N이 어느 날 격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강력한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된 건

같은 또래 남자애인 문지석과 피곤하게 얽히게 된 '그 사건' 이후였다.


중학교 3년 내리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즈로 지냈던 최다미와 강수영은

둘 다 부잣집 딸에다 공부도 잘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성친구까지 있었다.

다미는 같은 중학교에 학생회장을 하고 있던 남자친구가 있었고

수영은 혼자 짝사랑하는 남자애가 있었다.

하도 중학교에서 꽤나 인기남 베스트 탑 10에 들어간 그놈.

바로.. 문지석이다.


어느 날 수영은 N에게 비밀스러운 부탁을 하나 하는데

학교가 끝난 후 인기남 문지석을 몰래 뒤쫓아가자는 것이었다.

걔가 요새 만나는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느니..

집이 어디인지 알아둬야겠다느니 그런 시시껄렁한 이유였지만

그저 마음이 뜨거워 계속 쫓아다니고 싶은 순수한 16살 소녀의 열병이었다.


문지석은 두부를 빻아놓은 듯한 허여멀건한 얼굴에 조금은 두꺼운 입술,

날 선 큰 코와 옆으로 쭉 찢어진 눈을 가진.. 좀 무신경해 보이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성격에  

축구를 하면 늘 골을 넣어서 골잡이로 인기를 얻었던 그런 애였다.


수영의 별거 없는 계획은 이러했다.

문지석을 쫓아가보고 여자친구 유무를 확인한 후

없다는 게 증명이 되면?

이제야말로 수영이 큰 용기를 내어 천천히 다가가 친해져 보겠다는 것이다.

 

다미는 그날 학생회장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다 하여

N에게만 따로 부탁을 한 모양이다.

N은 그게 무슨 존심도 없고 쪽팔린 뒷조사인가 하면서도

살짝 재밌긴 하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한다.

돌직구 고백도 연애도 아닌 절친의 짝사랑 추적기에 동참하게 되었으니

하교 시간이 다가올수록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왠지 설레기도 했다.


종례를 하자마자

수영과 N은 잽싸게 문지석의 뒤를 밟는다.


지석이 학교 정문을 통과해 나가서 가까운 마을 시장을 지나치고   

문구점에 들러 뭔가를 사서 봉지에 들고 간다.  

거기서 다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가까워진 찰나에

지석의 집 파란 철문 앞에 같은 하도중의 1학년 여자애가 수줍은 얼굴로 서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수영은 완전히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씨... 뭐야.. 진짜 여자 친구 있나 봐!"


N은 잔뜩 실망한 수영을 달래 본다.

"헐.... 그래도... 좀 더 보자.. 여친 아닐 수도 있잖아."  

 

-


어느 담벼락에 붙어 지석과 1학년 여자애의 대화를 엿들어본다.

그들의 대화는 대충 짧고 굵었다.

수영에게는 행복한 소식이었다.

1학년 여자애는 문지석에게 '선배 좋아해요. 저랑 사귀실래요.'를 날렸고

지석은 차갑진 않지만 시크하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으며 한 마디를 날린다.

'어... 아니. 미안한데.. 나는 별로.. 관심 없다.'


그러자 애가 닳은 여자애는

'왜요. 여자친구 없으시잖아요.' 했고

난처해하는 문지석은

'어. 근데 그런데 관심 없어서. 그럼 들어갈게.'

그리곤 여지도 없이 파란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1학년 여자애는 눈물이 글썽하며 잔뜩 심통이 나서는 괜히 땅바닥에 발을 쿵쿵거리며 돌아갔다.


-


수영은 양손에 주먹을 쥐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그날 수영은 마치 문지석과 커플이라도 된 듯 새로운 망상에 빠져들며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다.

별 일도 없었다.

지나가는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면 충분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N에겐 작은 돌풍의 전조현상이었다.


그다음 날.

문지석이 먼저 다가와 N에게 말을 걸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직전에 체육수업이 끝났다.

짧은 여우비가 내렸고 운동장이 축축해져서

야외수업 대신 체육관에서 수업을 하기로 변경되었고

남녀혼합으로 피구 경기를 했다.


N은 공을 세게 던지지는 못하지만

보기보다 유연했기에 이리저리 공을 피해 끝까지 살아남는 편이었다.

수영은 지석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피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티가 났다.

N은 그저 출렁이는 가슴이 눈에 띄지 않게 어정쩡한 걸음으로 공을 피해 다니느라 바쁠 뿐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문지석이 다가온 시점은 그때였다.

체육부장으로서 피구공을 카트에 던져 뒷정리를 하고 있는 N에게 성큼성큼 걸어온다.

혼자 온건 아니고 저 멀리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불청객 남자애도 한 명 곁들여 있었다.

왕 안경을 끼고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난 이 학교의 메가폰으로 불리는 그 남자애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지석과 N의 광경을 관람했다.


지석이 툭 하고 던진다.

"야... 니 N 맞제?"


N은 그저 이게 무슨 불길한 느낌인지 알아채려 하지만

아직 미궁이라고 찰나에 생각하던 중 멍하니 지석을 쳐다봤다.


어제 부지런히 도 쫓아갔던 그 문지석이 뭔가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따지러 왔나? 속으로 뜨끔 했지만 대범하게 대하기로 한다.


"어...?  어.  나 맞는데. 왜?"


문지석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별 고민도 안 했다는 듯 또다시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어제 니랑 강수영이랑 내 쫓아온 거 맞제?"


너무 직설적인 물음에 N은 순간 얼음이 되었다.


"아....  우리가?  니를? 쫓아? 어...~? "


문지석은 피식 웃는듯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니네 어제 우리 집까지 쫓아오는 거 내가 다 봤거든..

그렇게 대놓고 쫓아오는데 누가 모르노?"


N은 이미 수습할 여지도 변명도 없음을 알았다.


"아...   맞아...   그게... 쫓아간.. 건 아니고 그냥 뒤따라 좀 간 건데...

그..."


문지석

"니 내 좋아하나?"


N은 전혀 예상외의 발언에 더 말을 잃었다.

임기응변에 조금은 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같은 경우엔 퍽 난감했다.


강수영이 니를 좋아해서 쫓아갔다!라고 있는 그대로 밝히기엔  

무조건 비밀을 지킨다 했던 절친의 약속을 깨버리는 거고..

그렇다고 다른 핑계를 대자니 거짓말할 핑계가 생각도 안 나고

일만 커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문지석의 저 발언에 마냥 아니라고만 하면... 머리가 정지되었다.


'일단 아니라고는 할까?'


N은 시치미를 뚝 뗀다.


"뭐라고? 내가? 너를? 아니!"



문지석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또 얘기를 한다

"아니가?...  애들이 그러던데?  니가 내 좋아해서 학교에서도 계속 쳐다본다고."


N은 아차 싶었다.


수영이 문지석에 관한 모든 것을 주시해서 알려달라는 부탁 때문에

가끔 문지석의 근처에 있는 여자애들을 주시하고

같이 어울리는 남자애들을 자주 쳐다보긴 했기 때문이다.


N은 속으로.. 결심한다.

앞으로 남의 애정사에 곁다리라도 껴들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또 한다.

 

게다가 자기가 문지석을 좋아한다는 그런 오해 따위는 정말 추호도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닌데?  니 말고도 다른 남자애들 마~~ 니 쳐다본다. 내가."


문지석은 갑자기 정색하며 얘기했다.

"다른 남자애들 왜 쳐다보는데?

내만 쳐다보면 되는 거 아니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이가.

N은 이 애매하고 알 수 없는 대화를 빨리 끝내고 도망치고 싶었다.


"뭐라 하니 계속.. 아무튼 어제는 그냥..

수영이랑 둘이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 뭐.  니가 쫌 궁금해서 쫓아가보자 했는데

심심하고 쓸데없어서 관두고 빨리 갔다.

니 좋아하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알겠나?"


문지석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조금 다른 표정으로 진지한 말을 던진다.

"맞나... 알겠다.

근데... 만약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니 내 쪼금이라도 좋아하면... 나도 니 관심 있거든?"


우르르 쾅쾅. 심장에 번개가 때리는 듯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N은 내적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져들었다.

이 이야기를 수영이 알게 되면.. 그동안의 우정은 단박에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야... 갑자기 관심은 무슨... 나는 니 관심 없거든?"


차가운 말이었지만 N은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평화로운 학교생활과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하여.


문지석은 그 후

"알겠다. 담에 보자" 하는 말로

어째 빨리 상황을 종료시키고 교실로 돌아갔다.


"휴.."

N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리고

N은 다음 수학 수업을 위해 교실로 뛰어간다.


뛰어서 그런 것인지 방금 전의 사건 때문인지

자꾸 기분이 묘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자애한테 고백받는 게 이런 기분인가? 깨림칙... 하네.'


머릿속은 이 소문이 삽시간에 학교에 퍼질 텐데

수영이 얼마나 충격을 받고 실망을 할지...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 믿었다.

수영은 '그딴 놈 갖다 버려야지- ' 하고 금방 괜찮을 테고

우린 여전히 친한 친구로 지내게 될 것이었다.

나의 황당함에 함께 공감해 주며 그 새끼 완전 헤픈 새끼야 하고

같이 뒷담화나 하며 그렇게 털어버리고 늘 그랬듯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겠지.라고

N은 그렇게 믿었다.


며칠 후 N은 수영에게 통보를 받는다.

불길한 느낌이 언제나 적중하듯.

지독하게 차갑고 서늘한 통보였다.


수영은 N과 점심을 같이 못 먹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자기가 배가 아파서 양호실에 갈 거고

그 후에는 아마 다른 친구랑 밥을 먹을 수도 있다는

이상하고 친절한 변명이었다.

 

당시 N의 중학교는 급식시설이 있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소풍을 내자는 기분으로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 날이 있었다.

그날만은 1학년,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만나서

학교 벤치나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소풍 온 듯한 기분으로

점심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늘 다미, 수영, N은 함께 모여 밥을 먹곤 했지만

그날부터 달라졌다.


분명 다미와 수영은 같이 밥을 먹는 것 같았다.

하지만 N은 그곳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다.  


혼자 교실에서 어찌어찌 다른 친구들 무리에 껴서

조용히 점심을 먹게 되었지만

이토록 불안하고 슬픈 기분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문지석과 관련돼서 학교에 어떤 묘한 분위기나 소문이 감지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N은 소문이 나지 않은 거라고... 지켜보던 안경잽이 메가폰이 별 재미가 없어서

다른 것에 취미를 붙이고 잊어버렸길... 기대했었다.


자존심이 쎄 보이는 문지석도 차인 입장에 떠벌떠벌 하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이 모든 것은 그저 N의 실낱같은 희망이었을까.


N은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온 소시지며 계란이 목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이 숨 막히는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얼른 밥을 다 먹고 N은 수영과 다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상으로 향한다.

끼익-  

녹슨 손잡이의 옥상 문을 천천히 열어보니

예상대로 옥상 저 멀리서 다미와 수영이 돗자리를 펴고 누워있었다.

둘 다 밥을 먹었는지 빈도시락은 돗자리 밖으로 빼놓고

사과주스를 한 개씩 쭉쭉 들이키며 돗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N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친구들에게 다가가려 하는데..


순간 누워있던 다미가 말을 꺼내기에 잠시 주춤하며 멈춰 선다.

아무래도 다미와 수영 둘이서 어떤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


다미

"아니 그니까...  문지석 걔도 좀 대단하네?

N한테 고백해 놓고... 사귈 것 같으면 소문날 법도 한데

그렇게 조용히 있었다는 거 아이가?"


N은 심장이 철렁했다.

'사귈 것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영이 얘기한다.

"그러게... 조용히 있었다는 거 자체가..

진짜 문지석이랑 N이랑 사귈 거라는 거지?

우리 모르게.."


N은 당장 뛰어가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자꾸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계속 억울하다며 요동을 쳤다.  


다미

"만약에 수영이 니가 문지석한테 고백하면서..그 얘기 못 들었으면..

우리 N이랑 문지석이랑 사귈 때까지 쌩판 몰랐겠네..맞제?"


수영

"그렇지? 내가 고백하길 잘한 것 같긴 해. 안 그랬으면 진짜 N한테 뒤통수 맞는 거니까.."


N은 그 순간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에 발에 무게추가 올려진 듯

온몸이 굳어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둘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다미

"근데.. N도 고백받고 우리한테 말하기 좀 민망하긴 했을 거 같다.."


수영

"그래... 나 같아도 얘기 못할 것 같긴 해.

N이 문지석한테 관심 없는 건 우리도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


N은 순간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역시.. 내 친구들.. 날 믿는구나.'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로 다시 돌아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 순간.


다미

"근데... 사실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건... 진짜 좀 이해가 안 되긴 한다. 크크"


수영

"어... 무슨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아."


멀리서 본의 아니게 몰래 듣고 있는 N은 귀를 쫑긋 세웠다.

도대체...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걸까. 내 친구들은.


수영

"문지석 같은 애가 왜 뚱뚱하고 졸라 이쁘지도 않은 N을 좋아하는 거야?"


-


그 후로

N은 가장 절친한 친구라 여겼던 그들이

한순간에 가장 먼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 모든 즐거웠던 시간과 끈끈했던 유대감 따위

모래 위에 세워진 성처럼 무너지기 쉬운 것임을 알아버렸다.



다미

"그니까... 남자애들이 은근히 그렇게 생긴 애를 좋아하나?

뭐 언제는 머리 길고 마르고 눈 크고 뭐 그런 여자애 좋아한다더니만?"


수영

"내가 둘이 사귈 수도 있다는 얘기 듣고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문지석 반에 송현주한테 좀 물어봤거든?

송현주가 그러더라.

문지석 걔가 남자애들이랑 하는 얘기를 한번 들었었는데~  

N이 좀 통통~하잖아?  근데 체육 때 피구하고 달리기 하고 할 때 보면

막 가슴 큰 거 완전 티 난다면서..

문지석이 그거에 꽂혀서 N한테 관심 있어했다고 막 그러데?"



다미

"아~ 진짜!  뭔데~ 문지석 걔도 그러면 똑같은 놈이네."



수영

"그러게.. 남자새끼들 다 똑같은 가봐.

N은 좋겠다. 남자들한테 인기 많아서.

근데 진짜 너무 화가 나... 문지석한테 고백받고 N이 사귈 수도 있다는 듯이 했대잖아... 배신자."


다미

"맞다... 배신자."


-



N은 중학교 3학년의 남은 세 달의 시간 동안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다미, 수영과 멀어졌다.

이제 모두 고등학교에 진학할 텐데

어차피 인문계 고등학교 선정은 뺑뺑이였고

성적이 안 좋은 애들은 실업계를 피하려고

막판에 학교 시험에 열을 올리는 터라

N은 그들과 함께 공부에 몰입하며 그저 조용히 지냈다.


하루하루가 지극히 숨 막힐 듯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문지석은 그 후로 N에게 말을 붙이곤 했지만

N은 거의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버려

문지석은 제 풀에 꺾여 저절로 멀어지는 듯했다.


왜 수영에게 거짓말을 했냐고 따져 묻고도 싶었지만

어디선가 문지석과 그런 얘기를 하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또 어떤 거품이 붙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닐지..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3년 같은 3개월이 흐르고

긴 겨울방학이 끝나면서

N은 중학교 졸업식을 맞이했다.


그리고

인문계열의 유명 사립 여자고등학교로 발표가 났다.  

'창신고등학교'는 재단이 빵빵하기로 소문난 사립 여고였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나름 손꼽히는 학교였던 이유는

학생들의 대학진학률과 높은 모의고사 성적도 한 몫했지만  

교내 서클 활동이 매우 화려했다는 것이다.


매년 12월에 웬만한 대학 축제에 버금가는 규모의

고등학교 축제가 창신여고에서 열렸다.

 

그때는 온갖 서클의 부스와 체험, 공연이 성황리에 열렸고

그 도시의 다른 고등학교, 특히 남자고등학교에서

도떼기 시장처럼 몰려오는 행사였다.


N은 중학교 졸업식에서 다미, 수영과 마주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두 가면을 쓴 채

'잘 가 ' , '잘 지내'라는 인사를 웃으며 주고받았다.


부모님이 모두 차를 타고 나타나 화려한 색색의 꽃다발과 선물을 안겨주고

학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

N은 오늘도 일하러 나가던 엄마에게

'요새 졸업식은 완전 대충 하고 끝나니까 안 와도 괜찮다. 부모님 안 온다는 애들이 엄청 많더라'라는

거짓말을 하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N은 졸업장만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선

혼자 천천히 아무 미련도 시원섭섭함도 축하도 없이

조용히 학교를 걸어 나갔다.

아무렇지 않았지만 자꾸 심장엔 싸르르한 전기가 통하는 듯했고

눈에선 눈물이 차오르는 게 이상했다.


매일 걸어오던 그 학교 밖 담장을 지나고 있는데

벌써 빨간 장미꽃들이 덤불로 피어 있었다.


2월이었다.


-


N은 그 순간 붉은 장미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달빛 도사?"


순간, 어릴 때 보았던 세일러문 만화 속 남자주인공이

까만 턱시도를 입고 등장할 때 휘날리던 붉은 장미꽃잎처럼

담장에 피어난 장미꽃에서 붉은 꽃잎이 한 장 떨어졌다.


붉은 꽃잎 위에 달빛 도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옷을 털어내고 있다.

 

"장미에는 뭐 이리 벌레가 많이 끓는 건지~~!

에잇 오늘 너네 상대할 때가 아니야 ~ 저리 가라!"


도사의 옷자락에 들러붙어있던 진딧물 같은 벌레 한 마리가 공중으로 튕겨져 날아간다.


N은 너무 신이 나서 소리친다.


"왜 이제야 왔어요! 도사님!! "


달빛 도사, 육중한 몸의 벌레를 털어낸 후

그제야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롱 타임 노 시! "



N

"어디 다녀왔어요? 그동안 한참 못 봤어요 ~"


도사

"서양에서 일을 좀 보느라... 덕분에 영어도 좀 익혔고..

N. 그런데 네 소식이 워낙 내 귀에 빨리 들어오잖니~?"



N

"제 소식이 들렸나요?  

아...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뭔지 알죠... 사실... 최근에... 정말 기분이

쓰레기통 같았거든요. 졸업했으니 뭐.. 이젠 시원하지만..."



도사

"노노~~  시원하다는 것은 감정의 가면일 뿐이야.

중요한 것을 회피한 채 그저 벗어났음에 대한 자기 합리화지.

...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 정말 시원해?

아니지..  가짜 시원함 뒤에 엄청난 복수심과 분노... 원망... 자책이 깔려있지."



N은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 모든 하찮은 사건들이 왜 자신에게 벌어져서 이렇게 폭풍 속을 살게 하는 건지

왜 이렇게 친구들이 자신을 쉽게 떠나버린 건지...

알 수 없는 대상을 골라 마구 원망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끝도 없이 자책하며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도사

"자... N. 너를 처음 본 게... 벌써 몇 년 전이구나.

첫 번째 소원 이후로... 세월이 좀 흘렀지. 물론... 너의 세계에서만.

이제 나와 거래했던 너의 두 번째 소원을 설계할 때가 왔어."



N

"도사님...  근데... 나 그 두 번째 소원이 뭔지 까먹었는데요?"


도사

"하! 참... 어이가 없구먼.

그래 뭐.. 인간은 자신이 뭘 원했는지 쉽사리 잊을 수도 있지.

하지만, 신의 세계는 모든 약속이 철저히 이뤄진다.

한 치의 오차도 없고 한치의 사사로움도 없지.

모든 약속은 천지에 공표되고 새겨질 뿐.

자 - 그럼 너의 두 번째 소원을 내가 읊어주랴?"



도사는 갑자기 너풀거리는 도포자락 소매에서

자기 몸보다 커다란 족자를 하나 쓰윽 거 내더니 휘리릭 펼쳐서

N의 눈앞에 펼쳐준다.


< N의 소원 >

두 번째. 이 꽃처럼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로 살게 해 주세요.      



N은 박장대소를 했다.

"아하하하! 하하하! 아 맞아~ 이제 기억났어요!

내가 그때 세일러문이랑 ~ 그런 만화에 심취해서 ~

변신! 해서 미니 드레스 입고 악당 무찌르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거든요~!"


도사는 N을 쏘아보며 얘기한다.


"이 그 이 그.. 쯔쯔쯔... 넌 이게 웃기냐?

니가 쓴 소원 중에 이게 제~~ 일 고난이다.. 얼마나 큰 것을 내놓아야 하는 줄도 모르고... 쯧쯧..."


N

"... 뭘 내놔야 돼요?  왜요? 그냥...  날씬하고 예뻐지면 좋죠...

그 누구도 속으로 저를 깔보거나 무시할 수 없도록.. "



도사

"예쁘고 아름다운 외모는 말이지... 전생사에 고귀하고 위대한 공덕을 많이 쌓고

자신의 신체를 크게 희생한 적이 있을 때 얻어지는 결과물 같은 거야...

물론 타인을 홀리는 마력은 그와 다르게 색마가 위장을 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네가 원한 건 예쁘고 아름다운 외모잖아?"



N

"네. 그렇죠 ~!

자, 그럼 저는 언제 짜잔~ 하고 변신을 하나요?"



도사

"이 장미의 향기를 맡아보았나?"



N

"음~ 네~ 그럼요! 빨간 장미꽃 향기는 진짜 진짜 좋아요..!"



도사

"이렇게 강한 향을 내뿜어서 더욱 아름답지..

그래서 말이야. 이 장미는 다른 꽃들보다 훨씬 더.. 벌레가 많이 끓는다.

내 말인즉... 너도 아름다워지는 만큼 끓어대는 벌레를 다 감당해야 한다는 거야.

알겠니?"


N

"음... 벌레들이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뭐가 되었든 감당해야죠."


도사

"하여간... 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


N

"자! 언제 예뻐지나요?"


도사

"나를 뭘로 보고 시간을 묻냐.

이미 시작되었다."


N

"네?"


알싸하고 향긋한 장미 향기와 함께 바람이 지나갔다.


-


그때, 누군가 N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교장선생님이다.

조례시간에나 얼굴을 보던 근엄한 분.


N

"아.. 교장선생님. 안녕하세요!"


N은 허리를 숙여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인자한 표정에 멀대같이 큰 키의 대머리 교장선생님.

키가 190센티에 달하는 거구였다.


"너 3학년 7반의 N 맞지?

아까 교장실에서 보는데 혼자 걸어가길래..

부모님이 오늘 못 오셨나 보구나?"


N

"아.. 네.. 오늘 바쁘셔서요."


교장선생님

"그래~ 그럼 선생님이랑 사진 한 장 찍을까?

그래도 마지막인데.. 사진 한 장 안 남기면 섭섭하지~"


N

"아 정말요? 네... 저야.. 감사하죠.."


교장선생님은 학교 대문 앞에서 '즉석사진 인화'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열심히 영업을 뛰던 사진사 아저씨에게 걸어가더니

뭐라 말을 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해 준 뒤

N과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사진사 아저씨

"자~ 찍습니다!

여기 보시고 ~~ 김치~~ 웃으시고 ~ 그대로 계세요~!

자.. 하나, 둘, 세~엣!"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힌다.


잠시 후 사진사 아저씨는 조그만 트럭 트렁크를 열고 어떤 기계를 만지작 거리더니

1분쯤 지나 금세 사진을 인화해 왔다.


N

'아니... 무슨 사진이 이렇게 빨리나 와?'


교장선생님은 그 사이 학교 업무를 봐야 한다고 인사를 하고선

다시 돌아간다.


N, 인화된 사진을 본다.


이상하게 장미꽃향이 사진에서 풍기는 듯하다.

그런데 N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에 거울 속에서 보던 자신의 모습과 사뭇 달라졌다.

분명히.

키가 커졌다.

190cm에 달하는 거구 교장선생님의

가슴팍에도 닿지 않은 키로 사진을 찍었는데..

이상하게 사진 속 자신은 교장선생님의 어깨에 닿을 정도로 키가

커져있는 게 아닌가!

거의 165cm는 되어 보였다.


게다가 얼굴 또한 변해있었다.


분명 N의 얼굴은 맞지만 눈에 띄게 날렵하고 갸름해진 얼굴형에

철저한 무쌍이었던 두 눈 위에 얇은 속쌍꺼풀이 자리를 잡았고

살에 파묻혀 있는지 없는지 숨은 쉬는지 의문스러웠던

콧대가 새초롬하고 매끈하게 뻗어있다.

입술은 봉숭아물을 들인 듯 상큼한 핑크빛으로 도톰해 보였고  

피부는 두 단계는 더 하얘져있었다.

항상 단추가 터지던 치마가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고

전체적으로 교복 또한 바람이 통해 살랑거리는 듯 보였다.



N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대~~~ 박!!!!!  도사님 ~~~ 땡큐 쏘머치~~ 알라뷰 ~~!!!!'


-


2005년 3월. 사립 창신여자고등학교.

1학년 3반.


N은 교복이 예쁘기로 유명한 이 사립 여고가 마음에 들었다.

중학교 때의 그 촌스런 진녹색 체크무늬 교복에서

하늘색과 그레이 컬러가 조화를 이후며

흰 셔츠 카라에 그레이 끈리본이 살짝 얹혀있는 세련된 디자인.


N의 몸은

그새 또 키가 자라고 살이 더 빠져갔다.  


키 167cm / 몸무게 56kg

누가 봐도 길쭉해 보이는 비율에 적당히 마른 핏의 몸.

굴곡이 살아있는 라인.


달빛 도사의 작품일까.

N은 꽤 만족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  끝 -


-4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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