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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Sep 01. 2024

1999년.매일 달에게 빌던 어느 날.

달빛 도사가 나타났다.

나의 세계에 벌어졌던 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돌고 돌아 다시 만난 그대여.

오랜만이군요.


나는 N입니다.


그대는 알고 있나요.

그대가 영원한 현재 속에서 수많은 세계가 중첩된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이 이야기는 그 수많은 중첩된 세계들을 오가며

내가 비틀어놓았고 혹은 바로잡아놓았던 어떤 '운명'에 관한 놀라운 기록입니다.    


돌고 돌아 드디어 만난 그대여.

이제 묻겠습니다.


세상이 마치 끝날 것만 같았던 1999년.

당신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운명으로 살고 있었나요?


이 책을 집어든 당신과 나는

그 운명 속에서 반드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었다면,

당신과 나는 반드시 다른 운명 속에서

만났을 겁니다.


이것은 그대에게 전하기 위한 아주 긴 편지가 되겠군요.


그 모든 '운명'에 대한 치유가 시작되었던 1999년에서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1999년 3월 13일.


경상도  - 신도시로 발전이 되려다 애매하게 멈춘 것 같은 부산의 어느 동네.

총 3단지로 구성 된 아파트 단지에서 34평대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 사는 집.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감히 내가 부르는 이 시대.

어린 소녀 N의 운명이 거대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날이었다.


N이 태어난 날은 1990년 음력 2월 17일.

빠른 생으로 학교를 일찍 들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성격이 많이 내성적이었던 소녀 N은

한 반에 총 40명인 학급에서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우자 가장 앞 줄에 앉게 되었다.

쌍꺼풀 없는 눈, 전반적으로 부드럽지만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

또래보다 훨씬 작은 키에 오동통한 몸, 들릴 듯 말 듯한 소심한 목소리 톤.

친구가 전혀 없진 않았지만 겨우 한두 명 인사를 나누고 서로 수줍어하며

대화를 이어나가긴 힘들었던 성격.


오후 4시. 댕댕댕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자박자박 걸어서 겨우 5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걸어온다.

그 길 중간에는 가끔 어디서 데려왔는지 알 수 없는

노란 병아리들 혹은 새끼 잡종 강아지를 박스에 모다 넣고 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간혹 있었다.

개학한 지 얼마안 된 3월 중순.

그때는 노랗고 삐약삐약 거리는 병아리들이 대략 15마리쯤 흙 묻은 박스에 담겨있었다.

N은 그 병아리가 눈에 밟혀 한참을 박스 앞에 앉아 들여다보았지만

이제는 차마 데려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작년 3학년 때 병아리 한 마리를 키우고 싶어서 500원을 주고 집으로 데려왔는데

부엌 바닥에 간혹 떨어져 있는 밥알이나 반찬 찌꺼기를 먹으려고 돌아다니던 그 노란 병아리가

아빠의 굳은살 가득한 발바닥에 밟혀 즉사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해 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와 자식들에게 다정함이라고는 거의 없던 아빠였다.

그 손가락 마디만큼 작고 가녀린 노란 병아리를 실수로 밝아 죽게 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미안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병아리가 날개를 몇 번 퍼덕거리다 금세 압사당해 죽어버리는 그 처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N에게 아빠가 사과를 하는 일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어린 심장에 죽음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건 어른들이 생각보다 가늠하기 힘든 비극이다.

식탁에 앉아 죽은 병아리를 보며 혼자 큰 소리도 내지 않고 흑흑 거리며 눈물만 폭포수처럼 쏟아내길 30분.


얼마 후  

노란 병아리는 엄마와 N의 손에 얹혀서 아파트 입구에 있는 작은 화단의

메마른 흙 속에 조용히 묻혔다.


그 후 N은 학교 앞 종이 박스 안에 노란 병아리가 눈에 밝혀도, 새끼 강아지들이 엄청나게 사랑스러워도

집에 함부로 들일 수 없게 되었다.


집 거실 작은 어항에 키우던 형광빛 주황색의 비늘이 어여쁜 금붕어 두 마리도 어느 날

배를 뒤집어까고 물 위에 둥둥 떠서 죽어있었는데

그 후론 집에서 어항이 사라졌고 금붕어를 키우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귀여운 병아리도 데려올 수 없었다.

아니 포기했다.

어떤 경험은 그렇게 영원히 새겨진다.


N은 이제 하굣길에 눈에 밟히는 작은 생명들은 그저 외면하고 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 후 N은 학교가 끝나고 조용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TV 리모컨의 빨간색 전원 버튼만 꾹 - 눌렀다.

네모나고 작은 TV가 팟! 하며 무지개 빛깔의 전기 신호를 터뜨리며 켜진다.

숫자 3과 8을 꾹꾹 누르면, 38번 채널로 바뀐다.


바로 N의 꿈이자 낙원이었던 '투니버스' 만화 채널이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거의 4시.

그때부터 시작해서 저녁 7시 30분쯤 늦은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시간대별 만화 프로그램이 전부 N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할 텐데 ~ 수 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세일러문~!"


평소엔 교복을 입고 평범한 소녀로 살지만 밤이 되면, 혹은 악당이 나타나면 변신을 한다.

그렇게 우주를 구하는 주인공들의 세계.

정의로운 이 세계의 질서를 지키고 악을 벌하기 위해

화려한 미니 드레스형 슈트를 입고선 빛나는 광선속에서 변신하는 소녀 영웅들의 장면은

반짝반짝 빛나는 아주 특별한 세계를 잠시 훔쳐본 듯 - N의 심장에 새겨졌다.


어쩌면 그렇게 새겨진 무수한 변신 장면들이 N의 '운명'을 창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가 말하길 N이 기억을 못 하는 아주 어린 4~6살 시절에는 그렇게 장난꾸러기에 애교가

마구 흘러넘쳤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의 함박미소와 찬사를 이끌고 다녔다는 기억에도 없는 그 시절 이야기가 N은 그저 낯설다.

 

7살 때부터는 또렷하게 이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N의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뀐 건 그때부터였다.


집이란 곳은 N에게 잠깐의 안도와 긴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는 아슬아슬한 곳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기에 늘 학교에 가면 의기소침했다.

친구들과 보내는 찰나의 순간들이 간혹 즐거웠지만

4시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안락한 지옥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몰려왔다.

늦은 저녁 이후 주로 몰아치는 아빠와 엄마의 살 떨리는 전쟁.

야밤의 도피.

술이 만취해 주먹으로, 혹은 던져서 부서지기 쉬운 물건을 마구 잡고 내동댕이치는 아빠를 견디는 시간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의 도피 생활은 N에게 끊임없이 어떤 이상향을 품고 살도록 만들었다.


다시 투니버스 만화 채널로 돌아가자.


<편성표>

오후 4시: 지구를 구하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

4시 30분: 엄마를 그리워하지만 인간 세상에 떨어져 외롭게 살아가는 '아기공룡 둘리'

5시: 인간과 괴물이 정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두치와 뿌꾸'

5시 30분: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같던 달리기 소녀 '영심이'

6시: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배추도사 무도사'

6시 30분: 고슴도치를 키우며 매일 밤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천사소녀 네티'


대력 이런 순서였다.


그 세계에 푹 빠져있다가

드디어 밤 10시가 된다.

그러면 다시 리모컨을 꾹꾹 눌러서 12번으로 돌린다.

 

MBC채널에서 배우 전광렬 씨가 출연하는 드라마'허준'이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민 80프로가 다 보았다는 그 드라마.

'허준'이 방영되는 월요일, 화요일엔 다행히 아빠도 술에 만취하지 않고 일찍 들어왔다.


그래서 N은 '허준'선생이 과거 수많은 병자를 살린 것뿐만 아니라

몇 백 년 후 1999년을 살고 있는 자신 또한 잠시나마 구원해 주는 위대한 은인이라 생각했다.


학교의 선생님은 가끔 TV가 바보상자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세상의 지옥을 일찍 견뎌내야 했던 N에게 그것은 바보상자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일탈이자 찰나의 구원이고 미래의 원대한 꿈이었다.

 

매일 술괴물로 변신하는 아빠를 보며 쌓여버린 어린 심장의 살해충동 또한

꿈과 모험의 세계에서는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그러나

그 티브이화면이 꺼지는 순간.

다시 어둡고 차가운 폭풍전야의 집의 공기를 느낀다.  

N과 10살 터울의 차이가 나는 오빠와 언니는 고등학교의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늘 반상회며 동창회 회장을 도맡아 일당 백 주부로 겸업을 했다.

N은 가끔 엄마가 해놓은 국과 반찬과 밥을 퍼서 혼자 밥을 해 먹었다.

대부분은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씻고 숙제를 하고 매일 비슷한 그림일기를 그리고

쪼그라드는 심장을 부여잡고 째깍째깍 흐르는 벽시계를 주시한다.


주 5일 다니는 회사처럼 주 5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가

부디 오늘은 평화롭게 잠에 들길 바라며 노심초사하다가

오빠, 언니가 돌아오면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모두가 편히 꿈나라로 가야 할 시간이

N에게는 밤새 불안에 떨며 안방의 인기척을 주시하다 겨우 피로에 지쳐 잠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N은 태양이 환하게 뜬 아침에 잠이 쏟아졌다.

아빠가 출근을 하고, 모두가 각자의 세계로 흩어지는 시간.

그 시간이 오면 N은 잠시 온몸의 긴장을 풀고 늦게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붙인다.

그리고 매일 부리나케 뛰어서 등교를 하면 어김없이 지각생 딱지가 붙는다.

그리고 매일 부리나케 뛰어서 등교를 하면 어김없이 지각생 딱지가 붙는다.


N의 작은 소망 중 하나는 늦은 밤 집을 빠져나와

조용히 세상을 구하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달의 요정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환한 낮에 편안한 마음으로 단잠에 빠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겨우 11살이었던 N은 이 어둠의 시간이 언제 끝날 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일 년 같은데 과연 몇 살쯤 되어야 독립할 수 있을까.  


N은 매일매일 밤하늘에 달을 보며 빌고 또 빌었다.

가끔은 짙은 운명으로 만나게 된 아버지라는 존재.. 그 누군가의 죽음을 은밀하게 빌기도 하고,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가족의 헤어짐을 미안한 마음으로 빌기도 하고,

아예 죽었다 새로 태어나길 빌기도 하고,

시간여행자처럼 만화 속 아름다운 세계로 빠져들어가길 빌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 누군가가 죽는 장면을 상상하는 자신의 마음이 섬뜩해서

다시 세상의 모든 이름 있는 신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엄마를 따라 간 산 중턱의 사찰에서 웬 스님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전생의 무슨 죄를 지어서'를 되뇌며 알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면

소원도 들어주던데.. 어디 그런 억울한 귀신 없나 만나길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

사람이 온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듣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올바른 때에 이루어진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사실을 명확히 알 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쯤 지나 N이 5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2000년. 10월 10일. 가을바람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던 때.


하늘은 푸르고 바람이 유달리 시원해서 이상하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그날.


아파트 입구 작은 화단에 작고 노란 꽃들이 귀엽게 피어나는

꽃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올해 초부터 작은 나무 묘목이 있긴 했는데

누군가 옮겨 심었다는 말도 없고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꽃도 아닌 나무가 피어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은 '만리향', '금목서'라고 흰머리가 무성한 경비실 할아버지가 알려주셨다.

작고 노란 꽃들이 나무에 올망졸망 무더기로 피어나는데

그 엄청나고 매혹적인 향기가 만리 밖까지 퍼진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금목서의 황홀한 꽃향기가 오랫동안 어두웠던 N의 세계에 거대한 희망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 후 N은 학교가 끝나고 바로 집으로 튀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화단에 만개한 그 노랑꽃들에 코를 박고 흠~ 하고 향기를 들이마시는 것에 심취했다.

그 향기를 맡은 순간은 뇌에 행복 호르몬이 쪼르르 하고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오늘 밤도 어두운 집에서 벌어질 전쟁과 도피가 두렵지만,

다가올 N의 미래는 왠지 이 꽃향기처럼 매혹적인 날들이 펼쳐질 것이라는 예언적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만리까지 퍼지는 향기와 함께 N의 운명에 어떤 징조가 시작되었다.


며칠 후 바람이 조금 더 싸늘해진 11월.

N이 살던 그 아파트에 경악할 만큼 흉흉한 사건이 벌어졌다.

N의 16층 집 위로 몇 킨더 올라가 19층에 살던 여자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자살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온 N의 집에

아파트 아줌마들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가 자살한 시간은 N이 아침에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오전 8시 30분이 지나고

엄마가 혼자 베란다 밖 풍경을 보며 빨래를 게고 있던 오전 8시 45분경이었다.


19층에 살던 여자는 베란다 난간에서 거꾸로 떨어졌고

19층부터 1층까지 같은 라인으로 있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 시간 하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떨어지는 그 여자를 목격했다고 한다.


17층에 살던 아줌마는 베란다 난간에 뭔가가 텅-! 하고 부딪히는 소리에

밖을 쳐다봤다가 떨어지는 여자의 발만 목격했다고 하고,

N의 엄마는 떨어지는 그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순간 목격한 후

너무 충격을 받아 약국에 달려가 우황청심환을 하나 사 먹었다고 한다.

오전 중에 신고를 받고 달려온 119가 시체를 수습했고

여자의 시체는 도로에 심어져 있던 가로수 나무에 반쯤 걸쳐진 채로 있었다는데

그 나무 아래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고 한다.


어린 N에게 엄마와 아줌마들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자고 했는지

쉬쉬하며 비밀에 부치고 싶었겠지만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신문보다 소문이 더 빠른 그 시대에

어른들이 숨기는 사실을 아이들은 더 빨리 알아챘다.

동네 애들이 그리 자주 모여 놀지는 않았지만,

흉흉한 사건은 오히려 사람을 뭉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지 않은가.

N을 비롯한 동네의 초등학생들이 모여 어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조합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서로서로 공유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이틀 후 벌어졌다.

새벽 1시경.

누군가가 그 동네에서 나름 용하다는 할머니 무당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할머니 무당이 모든 아파트 주민과 애들한테도 중요한 지침을 내리고 갔다는데

그 지침의 내용인 즉 - 죽은 여자의 풀리지 않은 한이 나무에 응해있으니

그 액을 지푸라기 인형으로 옮겨와서 태워버려야 한다고.  

나름 간소화시킨 굿을 한판 벌이고, 애기 손바닥만 한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빨간 줄로 칭칭 감고 나무 아래쪽에 꽁꽁 묶어둔 것이다.

그리고 그 인형을 삼칠일. 즉 21일 동안 아무도 만지거나 치우거나 건드리지 말고 놔두라고 했단다.


막장 드라마나 9시 뉴스. 혹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법한 사건이 실제로 N의 아파트에서 벌어졌다.

N과 아이들은 그 근처를 지나는 게 너무 무서워 삼삼오오 모여 다니거나

아예 그 길을 가지 않거나 했지만 또 이상한 호기심에 몰래 그 인형이 잘 있는지

슬쩍 보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21일이 지나고 할머니 무당이 와서 지푸라기 인형을 태움으로써

그 귀신이 잘 떠났다던지 동네가 평화로워졌다던지 하면 지극히 무난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기시되는 21일이 다 흐르기 전. 하루를 남겨둔 시점에

동네에 웬 꼬마가 소리를 질렀다.


"인형 없어졌다~!"


지푸라기 인형이 사라졌다.

빨간 줄로 칭칭 감아 나무아래 메여 있었것이 갑자기

아무도 못 본 새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아파트 단지는 난리가 났다.

엄마는 그 할머니 무당을 데려왔다는 20년째 근무 중인 경비 할아버지에게 물어

인형의 행방을 찾아보라 했지만

경비 할아버지도 순식간에 사라진 인형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소문 따라 들리는 짧은 후일담에 의하면

그 할머니 무당이 소식을 듣고 와서 혀를 끌끌 차더니

그 여자가 남은 한이 워낙 많아 그 혼이 인형에서 탈출을 했단다.

그리고 기가 빠진 인형의 지푸라기들은 바람에 흩날리거나

뭘 모르는 동네 바보가 호기심에 훔쳐가거나 했나 보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자기 손을 떠난 일이라며 이 아파트 단지가 무섭다고 얼씬도 안 했다고 한다.


한 동안 그 사건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과 소문을 통해 부풀려지고 혹은 곁다리가 붙고

들썩들썩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파트 사람들도, N과 동네 아이들도 조금씩 그 사건은 잊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묘하게 그 아파트 단지에 점점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름 화목했던 그 아파트 단지의 부부들이 날이 갈수록 사이가 안 좋아졌다.

N의 아빠도 무슨 영향을 받은 건지 폭언과 행패가 거세졌다.

N의 부모보다 더 심하게 싸웠다는 17층 아줌마네는 어느 날 아저씨가 칼을 들고

아줌마의 목을 그어서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하고,

착했던 아줌마의 딸 또한 갑자기 난폭하게 변하면서 아줌마에게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아파트 전체에 불행이 곰팡이처럼 퍼져나갔다.


그 모든 불행의 씨앗들이 언제부터 커진 건지 단언할 순 없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가을 이후 아파트 사람들이 이상해졌다고 불안해했다.


나중에 자살 사건의 내막을 알아보니 19층에서 떨어진 그 여자는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시골 어딘가에서 조용히 남편을 찔러서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자신의 집 19층으로 와서 자살을 했다고 했다.


누군가의 불행은 반드시 모든 세계로 번져나간다.


그렇게 축축한 곰팡이 냄새 같은 시간들이 또 1년쯤 흘러


N이 6학년이었던 2001년.

그리고 9월. 다시 가을의 초입.


티브이 뉴스에선 미국 쌍둥이 빌딩이 불에 타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시간 속 빌딩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시든 꽃들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을 찍은 사진들이 신문마다 대문짝만 하게 실려 나왔다.


N도 집에 배달된 조선일보 메인에서 보았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의 심장을 찌르듯 통과한 후

시꺼먼 연기가 마치 악마의 얼굴처럼 피어오르던 그 찰나를 찍은 사진은 가히 공포스러웠다.


-


N은 가끔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아직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비행기지만

하늘에 코딱지만큼 작게 보이는 비행기가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유유히 날아가는 걸 볼 땐

묘한 동경과 슬픔을 느끼곤 했다.


'저기 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그 느낌을 받을 때 N은 어렴풋이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묘한 우주적 사실 또한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 이외의 수많은 타인들이 각자 저마다의 세상 속에서

각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속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묘한 느낌을 감지할 때면

N의 가슴속엔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쌓이곤 했다.


'나는 왜 여기에 태어나 살고 있을까.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태어나 살고 죽을까. 이 지옥을 견뎌야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그 해부터 N은 아파트 화단에 있는 금목서의 노랑꽃들도 점점 시들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화사한 주홍빛과 코랄빛이 섞인 노랑꽃잎들이 급속하게 갈변되었다.

어린 가슴에 이 매혹적인 향기마저 사라지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작은 즐거움조차 없어지는 것이었다.

경비실 할아버지는 내년이 되면 다시 꽃이 핀다고 하셨지만

N은 왠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다시 늙어 죽는 그 시간이...

어쩌면 이 꽃들이 한 계절 피었다 반드시 떨어지고 사그라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 꽃들은 떨어져 죽어도 다음에 피어나는데

사람은?

사람도 그런 걸까?


왜 시간은 항상 앞으로만 흐를까. 왜 모든 것이 정해진채 태어날까. 바꿀 수는 없을까.

수많은 의문이 작은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지만

그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조용히 묻어 두었다.


매일 밤하늘의 달을 보며 빌고 또 빌던 서슬 퍼렇고 비극적인 소원들 조차

현실의 비극 속에서 점점 포기해갈 때쯤 -


N은 문득 금목서의 노랑꽃들이 다 떨어져 버리기 전에

간직할 방법을 찾아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저 꽃들의 향기를 모아서 간직하자!'


N은 엄마에게 받은 용돈을 들고 학교 앞 문방구로 달려간다.

그리곤 작은 편지지가 돌돌 말려서 한 개씩 들어있는 유리병 편지와 볼펜 한 자루를 사서 화단으로 갔다.

N은 유리병 속의 돌돌 말린 편지지를 꺼내어 자신의 소원을 주르륵 쓴다. 


1. 엄마아빠가 빨리 헤어지고 따로 살게 해 주세요.

2. 이 꽃처럼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로 살게 해 주세요.

3. 달의 요정 세일러문처럼, 아.. 많은 사람을 살리고 존경받는 허준 선생님처럼?

아무튼 그런 멋지고 위대한 사람으로 살 게 해주세요.

저는 돈보다 명예가 중요해요. 그런데 연예인처럼 유명해지진 않아도 돼요,

그럼 너무 피곤하잖아요. 조용히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부자로 살고 싶어요.  

4. 우리 엄마아빠같이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부부 말고요..

이 세상에 오직 서로만 사랑하는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서

서로 오래오래 사랑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5.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정말 있다면, 내 앞에 한 번만 나타나주세요.


편지지를 다시 돌돌 말아서 유리병에 넣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금목서의 향기를 모아야 했다.

N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거듭 확인한 후에

나뭇가지에 무더기로 옹기종기 피어있는 금목서를

손으로 주욱- 긁어서 훑어낸다. 


N의 손에 작고 노란 금목서 꽃들이 다발로 우수수 떨어져 내려

향기가 진동을 했다.

N은 그 꽃들을 하나하나 유리병에 넣어서 꽉 채우려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나뭇가지에서 떼어낸 금목서 꽃들에서 그 진하고 좋은 향기가

스르륵~ 하고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꽃들을 유리병에 넣으려고만 하면 자꾸 손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에만 우수수 떨어졌다.


"어랏!"


당황해서 이리저리 발을 구르다가 떨어진 꽃들을 밟으니

금세 갈변이 되어 푸스스~ 하고 꽃들이 썩어 들어갔다.


"어.. 어어... 꽃이 왜 이러지!!"


'아뿔싸.. 뭔가 이상하다..'


라고 싸한 느낌이 온다.

왠지 금목서 나무가 N을 노려보는 듯했다.

평소에 그렇게 향이 좋다며 끌어안고 코를 박고 좋아했던

금목서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딘가 가까운 허공에서 들리는 목소리.


" 야야야....! 너 때문에 다 망했다."


N은 혹시 경비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다가

혼내려 부르는 줄 알고 잔뜩 졸아서 고개를 돌려보지만 -

아무도 없다.


'... 뭐야.... 무섭게.'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야야야! 그만하라고...!  나 여기 있잖아!"


믿을 수 없는 일이 가끔 인생에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 목소리는 분명하게 금목서 나무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금목서 나무 가까이에 다가간다.

N은 나무가 한 말인 줄 알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금목서 꽃을 우수수 긁어낸 나뭇가지에 매끄럽고 짙은 초록색 나뭇잎 위에 - 15cm 조금 넘을까? 싶을 만큼

작은 키에 까만 도포를 입고 까만 갓을 쓴.. 무언가가 있다.

꼭 사람 같아 보이는 게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아닌가!


N는 그 초록색 나뭇잎 위에 까만 갓과 한복 같은 까만 옷을 입은 희한한 생명체가..

사람인지.. 외국 만화에 나오는 팅커벨 같은 요정인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N은 꿈인가 싶어 양손으로 볼때기를 챱! 챱! 떼려 보지만

꿈도 아니다.

리얼한 현실이다.


"누구... 세요?"


미니어처같이 한 손바닥에 다 들어오게 작은 생명체였지만

고고하게 풍기는 분위기와 중저음의 목소리는

N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임에 분명했기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며 존댓말이 나왔다.


"혹시 나무의 요정.. 님?"


갓을 쓴 얼굴을 휙-! 들어서 N의 눈을 노려보는 요정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말을 한다.



"난 그런 요물이 아니다.

나는 이 금목서 꽃과.. 지상의 식물과 꽃을 피워내는 달빛 도사다! "



N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그렇게 하루종일 빠져들던 그 만화 속 세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생명체가 기가 막히게 신기할 뿐이었다.


사이즈는 N의 손바닥만큼 많이 쪼그맣고 이상한 옷을 입은 존재가

입을 열고 말까지 하니 상황이 퍽이나 소름 끼치면서도 묘하게 웃겼다.


"달빛 도사..? 달의 요정도 아니고... 크크.... 신기해요.

달빛 도사! 안녕하세요."



달빛 도사

"그래. 넌 N이지. 널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 왜 내 꽃들을 다 뭉개버리는 거야?

얘네가 너 때문에 지진이 나고 으스러져서 이게 무슨 난리냐고

나한테 하도 잔소리를 해대기에!   내가 나타났다!"


N은 깜짝 놀랐다.

금목서 꽃들이 다 살아있었다는 말이다.


"아! 정말요?  아.... 아...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전 그냥.. 이 꽃향기가 너무 좋아서요...

근데 꽃들이 점점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유리병에 간직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리고 제 소원도 좀 들어달라고...  할랬는데요!

근데...

우와!!!"


갑자기 소리 지르는 N 때문에

달빛도사가 초록 나뭇잎에서 엉거주춤 미끄러지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다시 말한다.


"깜짝이야! 왜! "


N은 드디어 드디어 자신이 매일 밤 달을 보며 간절히 바랐던 소망을 들어주러

하늘이 달빛도사를 보낸 것이라는 혼자만의 깨달음을 얻고 환호했던 것이다.


"달빛 도사! 맞네~~ 제가 맨날 소원 빌었는데

그거 들어주려고 오셨네요! 우와... 우와 신기하다!"


잠시 무표정하더니 왠지 아주 황당하다는 듯 아니꼬운 표정의 달빛도사.


"뭐? 니 소원을 들어주러? 아.. 허....   착각하지 마라 얘야  ~

난 니 소원 따위 들어주러 온 거 아니다."



N은 순간 실망스러웠지만, 다시 자체 필터링을 통해 희망을 장착하고

기대에 차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럼 그럼 그럼 지금 제 앞에 나타난 게 우연이라고요?

아니에요 ~  분명히 달님이 제 소원 들어주라고 우리 만나게 한 거예요! "


달빛도사를 네 맘대로 생각하라는 듯 어깨를 으슥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달빛 도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그래.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

사람의 세계는 생각하는 대로 창조되거든.

내가 꽃과 식물을 피워낼 때 내가 생각한 대로 그들이 향기를 만들어내고

사람의 몸에 들어가 치유를 하니까 말이야.

가끔 오만한 꽃들은 자신이 태초부터 대단한 생명체라서 그런 능력이 있다며

망언을 해대지만

아냐.. 그건 지독한 오만이지. 모든 생명은 하늘의 큰 계획에 따라 창조되는 거야.

그들이 원래부터 잘나서가 아니라고."


N은 갑자기 지루해졌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도사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어려운 탄생과 너무 쉬운 죽음.

그 모든 각기 다른 운명의 탄생과 끝의 시작점이 어딘지 늘 궁금했었다.

N은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과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신비한 달빛 도사는 N에게 모든 의문을 해결해 주러 나타난 존재일까.


도사는 계속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이제 쌓여왔던 이 세상의 울분들이 들고 터질 것이다.

나는 이 인간 세계에서 동쪽과 서쪽을 모두 총괄한다.

인간의 눈에 내가 나타나 버렸으니...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인가? 허허 참...

신은 사람에게 들키면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어있다.

아... 요구.. 소원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은 서로를 버리고 배신하지만, 신의 세계는 보은의 법칙이 정확하지.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은혜 갚은 까치... 그 얘기 알지? 걔네 원래 신의 세계에 살던 짹짹이들이라 그래.

아무튼.. 나는 지금 너에게 쓸데없는 의무가 생겼으니... 빨리 말해봐라."



N :"신..? 그럼 도사님 당신이 신이에요?"



도사: "너 무식한 거냐.. 아님... 뭐냐?

모든 존재는 다 신이다.

너도 신이었고 지금도 신이 살고 있는 육신이고 죽으면

육신에서 벗어난 신이 되는 거다.

네가 손으로 아작 내버린 저 노랑꽃들도 다 신이고 이파리 하나도 신이다.

작은 신들은 나무라는 큰 신의 일부로 존재한다.

네가 부모의 일부를 받아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지.

이 세계의 모든 생명들은 큰 생명의 조각들이다. 그러기에 모두 신이고,

나는 특별히 구체적으로 저 높은 하늘에서 왔다 갔다 하는 높은 차원의 신이다."



N:"아...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모르겠어요. 하하.

아무튼.. 근데 제가 꽃들을 다 죽여버렸는데 왜 제 소원을 들어주시죠?

저 벌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요?"



도사:"벌이 두려우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어린애가 배짱 한번 좋구나.

뭐....  하나 더 세상의 비밀을 알려주자면...

네가 죽였지만 네가 죽인 건 아니다.

실은 이 꽃들의 정해진 수명이 바로 오늘이었지. 너는 정해진 흐름에 따라

네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N:" 네??"


도사:"네가 이 꽃들에게 베푼 것이 있다는 군.... 말."


N:"말? 무슨 말요?"


도사:"꽃을 향한 감탄, 감동, 사랑, 찬사의 말, 오래오래 아름답게 존재해 주길 바라던

그 마음 - 그 생명의 에너지가 이 꽃나무가 여기서 태어나도록 만든 것이다."


N:"네...? 점점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여기 꽃나무가 심은 건...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도사의 말은 점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N은 어렴풋이 자신이 그동안 노랑꽃들을 바라보며 말로

퍼붓던 애정과 사랑스러워하던 마음의 몽글몽글 따뜻한 느낌들이 떠오르긴 했다.


N:"아... 하하... 제가 뭐 딱히 한 건 없는 거 같은데요..

어쨌든.. 소원 들어주신단 거죠?... 제가 이렇게 다 적어놓긴 했거든요? 이거 보시면 돼요."


N은 유리병에 넣으려고 썼던 소원 편지를 둘둘 펴서 도사의 눈앞에 떡하니 펼쳐 보인다.


도사, 그 순간 정말 팅커벨처럼 사뿐히 공중으로 날더니

편지 앞으로 바싹 날아온다.

그리곤 실눈을 뜬 채 그 소원 목록을 읽어보더니..

그리곤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도사:" 흠... 너는.. 예상보다... 욕심이 크구나."


N:"아.. 그런가요? 욕심이.. 크면 안 되나요? 저는 아무튼 지금 엄청 간절해요... "


도사: "뭐... 신이 보은의 법칙을 어길 순 없지. 일단 접수는 했다."


N:"정말요? 그럼... 정말... 이 소원들이 다 이뤄지는 거예요?!"


도사:"그래..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소원은 어떤 창조의 경로를 통해 각기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중첩된 세계를 다 같이 돌려서 바꿔야 하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건 감당할 수 있겠나?"


N은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N:" 그게 무슨 소원 들어주는 거예요!! "


도사는 꽥하는 소리에 놀라 다시 휘리릭 날아서 금목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도사:"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N:"대가를 치르는 거면 그냥 노력해서 되는 거랑 뭐가 달라요!

소원이 이뤄지는 건 대가 없이 딱! 이뤄져야 되는 거 아니에요?"


도사:"흐음....   그건 틀렸어.

세상은 저 미물의 티끌부터 거대한 우주의 태양까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지.

그래서 작은 것 하나가 바뀌려면 실은 이 우주가 통째로 바뀌는 일인 거야. 알겠냐?"


N은 시무룩해졌다.

소원이 이뤄지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럼 혹시..  후회하게 될까?

N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는 듯 도사가 말했다.


"너의 첫 번째 소원을 만약 들어준다고 치자.

너네 아빠랑 엄마가 헤어진다.

그러려면 말이다

너네 아빠의 인생 궤적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에 다른 선택을 할 테니까.

그러려면 너네 아빠를 낳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낳은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머니의 어머니.. 또 그 위에... 쭈르륵 ~~

그 연결고리가 전부 다 바뀐다는 것이지.

너의 작은 소망 하나 가 이 세계를 온통 바꾸는 것이란다.. 어린 인간아.."


N은 왠지 도돌이표 같은 어려운 말에 답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게 뭐야... 다른 방법은 없어요?"



도사는 왠지 이제 재밌어하며 말했다.


"이 창조적인 우주에 다른 방법이 왜 없겠니.

그런데... 그건.. 쉽지 않을걸?

네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해야 하는 거다."



N:" 약속? 무슨 약속을 하면 되는 건데요?"



도사:"이 우주가 너에게 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너는 정해진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 일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네가 걷는 그 길을 바꾸겠다는 소리지.

어차피 목적지는 똑같아.

결국 꽃길을 걷겠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큰 약속을 하나 해야 해."


N:" 아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할게요."


도사:"너의 부모는 전생사 서로 지독한 빚을 진 사이다.

집안과 집안사이에 진 빚이지.

네가 그걸 감당해야 하는 운명이기에 태어난 것이다.

너의 부모는 서로가 서로를 만나 고통을 겪고 지옥을 겪으며

정해진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과업이 있다.

네가 그걸 중간에 끊어달라고 한다면...

너의 부모는 수명이 바뀐다. 운명이 바뀌지.

그럼 마땅히 겪어야 할 그 일을 누가 대신 겪어야 한다.

그게 누구일까?"


N:" 설마 나?"


도사:"옳다."


N:"그건 싫죠. 내가 그 운명을 대신 왜 겪어요. 그게 싫으니까 바꿔달라는 건데.."


도사:"그렇지... 그래서 보통은 모두들 소원을 빌려다 지레 포기한다.

그저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기로 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N:"순응하지 않는 사람들?"


도사:"그래. 피해 간 운명을 네가 대신 겪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니 모든 생각과 마음을  죽기 살기로 통제하는 것이다. 조건 없는 감탄과 감사의 마음으로."


N:"그런 거면 뭐... "


도사:"과연.. 겨우 그런 거 일까?

사람의 운명을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창조된다.

그 생각과 마음 또한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늘의 큰 뜻이자 세계의 거대한 흐름이다.

모든 생명은 그 연결고리 속 조각의 일부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이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생각으로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한다고 믿지.

그 선택이 얼마나 이타적이든 대단하든 숭고하다고 혼자 생각하든

그것은 그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타적이라 믿는 인간들이

사실은 가장 어리석고 이기적이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너의 생각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것이 아직도... 쉽게 느껴지니?"


그러나

N은 이미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알고 있었다.

달빛 도사가 어떤 무서운 이야기를 하든 겁을 주든

자신의  작은 선택이 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든

자신의 선택은 정해졌음을 알았다.



N:"쉽지 않은 거 알겠어요.

그런데... 모든 게 큰 흐름의 일부라면..

지금 나의 선택 역시.. 내 선택이 아닌 큰 흐름의 일부겠죠."


도사는 뭔가 들킨 듯 한 묘한 표정을 지은 후

씩 웃었다.


달빛 도사:"너의 선택이 이뤄졌다. 우린 또 보게 되겠구나."


감자기 허공에서 돌풍이 불며 금목서 꽃들이 마지막 향기를 퍼트리며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달빛 도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저 멀리 아파트 옥상 위로 코랄빛 노을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퍽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코랄빛을 가득 품은 구름들이 N의 마음에도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삶이 조금은 설레기 시작한 기적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멍하니 서있는 N에게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N아 ~!! N아~~ 니 여기서 뭐 하니?!!"


엄마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왔다.


N:"어, 엄마 왜?"


엄마:"오빠야가 니가 새벽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집을 나갔다 갈래!

아파트 옥상까지 가서 한참 찾았다!!

아~가 이 새벽에 자다 말고

옥상에를 갔나...  아랫집 친구한테 이 새벽에 놀러를 갔나...

엄마 깜짝 놀랐다 아이가!  

언능 집에 들어가자!"


N은 이게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분명 아파트 뒤로 코랄빛 노을이 눈이 부셨고,

하늘은 뭉게구름과 함께 밝았다.


소원을 들어준다던 달빛도사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새벽에 잠을 자다가 뛰쳐나왔다니.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모두가 잠들어서 아무도 밖에 나와있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다.


이 모든 시간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엄마 손에 붙들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정말로 집에 가서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바뀌었다.

뭔가가.



그러나 이상하게 N은 극도로 평화롭고 차분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안방에 드르렁 거리며 코를 골고 자는 아빠는 평소와 같아 보였다.


-


N:"부명... 꿈이 아닌데."


-


그리고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이 흘렀다.

똑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견뎌냈다. 하지 마

똑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견뎌냈다.

하지마

N은 실망하지 않았다.


집안에 어둠이 들이닥치면

이 모든 시간과 공간이 정해진 대로 흐르고 있음을

마땅히 느끼며 흘러 보내야 할 시간임을

모든 게 정해져 있음을

그저 받아들였다.


크고 작은 사건들과 야밤의 피난도 반복되었지만

N은 그저 순응했다.


가슴에 폭풍처럼 두려움이 밀려와도, 살 떨리는 공포에도,

대상이 없이 뻗쳐오르는 분노의 마음을

그저 지켜보다가 사그라드는 것을 견뎌냈다. 


그리고 가끔 달이 휘영청 밝을 때면

도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2001년의 9월.

민족의 대명절. 추석.  


온 가족이 다 모인 집안.

할머니와 친척들 앞에선 술괴물이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던 1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통틀어

아빠는 평생에 마실 술을 그날 다 마셨고

N의 집 거실에서 오랫동안 N의 가족을 지켜보고 있던

하얀 난초 화분을 엄마의 머리에 집어던졌다.


엄마는 머리에 피가 흐른 채 119 응급차에 실려갔고

아빠의 혈육과 아빠의 부모와 모든 친척들이 그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응급실에서 겨우 머리를 몇 바늘 꿰매고 나온 엄마는

10년 동안 움츠러들었던 그 힘없는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모든 시부모와 집안식구들 앞에서 용기 있게 아빠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


N의 첫 번째 소원이 실현되었다.


달빛 도사가 이 모든 것을 계획했을까?



<그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치유하는 금목서'>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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