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1 : 그 강렬했던 흰 색

그들의 시선

by 반더루스트

*2004년 스마트폰 모바일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여행기 입니다. 니콘F801S, 필름 30통 그리고 300만화소 디지털카메라,Lonely planet 책한권을 들고 떠난 여행이라 요즘 여행방법과 다를 수 있어요.



공항, 그리고 새하얀 시선...


2004.01.26


항공기 창문 너머로 펼쳐진 인도는 스모그에 잠긴 거대한 회색빛 도시였다. 한낮의 해조차 흐리게 만드는 안개 같은 대기 속에서, 델리는 마치 신비로운 베일을 두른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델리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그 공기는 뜨겁고 묵직했으며, 먼지와 향신료, 그리고 이름 모를 삶의 냄새들로 가득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낡고 거친 공항의 모습은 첫 만남의 설렘보다는 낯선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화려함으로 치장된 현대적인 공항에서라면 익명의 존재로 자연스레 섞여들 수 있었겠지만, 이곳의 솔직한 낡음 앞에서는 나의 존재가 너무도 선명하게 노출되는 기분이었다. 과연 내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아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 나만 쳐다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의 시선을 진정으로 사로잡은 것은 건물이나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눈이었다.

까맣고 깊은 동공 주변으로 펼쳐진 하얀 공막이 유독 크고 선명하게 빛났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그들의 눈동자는 내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 마주치는 인도인들의 시선에서 나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느꼈다. 정말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는 듯한 날카로움, 혹은 내가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있는지 가늠하는 듯한 깊은 통찰이 깃든 시선이었다. 그 무수한 눈빛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덩그러니 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입국심사대로 향하는 길목곳곳에는 소총을 든 경찰들이 여럿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총을 어깨에 걸친 채 무심히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었지만, 우리나라 공항과는 사뭇 다른, 어딘가 모르게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침내 입국심사대 앞에 섰을 때, 심사관은 내 여권을 받아들고는 오랫동안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 날카롭고 의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런 질문도, 말도 없이, 오직 시선만으로 나를 해부하듯 훑어보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손바닥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고, 마치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죄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목적?"

짧고 굵은 목소리가 팽팽한 침묵을 갈랐다.

"관광입니다."


그는 다시 여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 올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려는 듯한 그 시선은 나를 한없이 위축시켰다. '쿵' 하는 도장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나는 그의 눈 속에 갇힌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인도라는 나라가 내게 던진 첫 번째 시험이었을까. 비록 통과했지만, 그 시선의 무게는 여전히 어깨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수십 대의 릭샤가 벌떼처럼 나를 에워쌌다. 노란색, 녹색, 검은색으로 칠해진 삼륜차들이 내 주변을 맴돌며 각자의 언어로 목적지를 물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간절함을 넘어선, 삶의 무게가 실린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디 가? 어디 가?"

"택시보다 싸다!"

"빨리, 빨리!"


힌디어, 영어,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벽을 이루었다. 손짓과 몸짓이 공기를 가르고, 그들의 시선이 맹렬하게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그 포위의 중심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서 있었다.


그린과 옐루우가 절묘하게 섞인 오토릭샤


처음 인도 땅을 밟은 나에게 릭샤는 너무나 불안한 선택지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택시가 서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택시 운전사들 중 가장 조용하고 순해 보이는 이를 골랐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소리치지 않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나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의 택시는 낡았지만 깔끔했고, 무엇보다 그의 눈에서 위협적이지 않은, 오히려 편안함을 주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택시는 올드델리의 거리로 나를 이끌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델리의 풍경은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거대한 교향곡 같았다. 매운 향신료와 흙, 땀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고, 쉴 새 없이 울리는 경적 소리가 귀를 때렸다. 소, 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인 도로 위에서 우리는 마치 위험한 물살을 헤쳐나가듯 아슬아슬하게 나아갔다.


"Which contry?"

운전사가 백미러 너머로 나를 보며 물었다. *인도 사람들은 흔히 "어디서 왔느냐" 대신 "어느 나라?"라고 직설적으로 묻는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Korea!"

"좋은 나라야. 어제도 한국 사람을 태웠어. 어제도 말했지, 인도는 좋지만 어려울 거라고!"


그의 말에는 인도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동시에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듯한 체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어려운 나라'라는 표현은 내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택시는 좁은 골목을 누비며,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델리의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색색의 사리를 입은 여인들, 터번을 두른 남자들,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운전사는 숙소가 밀집한 동네에 나를 내려주었고, 나는 곧바로 숙소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거리에 쏟아지는 호객 행위는 너무나도 심했다.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두세 군데를 둘러보았지만, 모두 기대 이하였다. 결국 지쳐서 가이드북을 꺼내 가장 가까운 숙소를 무작정 선택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숙소는 예상 밖이었다. 좁고 답답한 로비와는 달리, 배정받은 방은 크고 깨끗했다. 드디어 무거운 배낭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면서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대충 짐을 풀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나는 곧장 숙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올드델리였다. 지저분한 거리, 그리고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려 하고 말을 걸어오는 인도인들의 시선은 경계심을 늦출 수 없게 만들었다. 낯선 이들의 끊임없는 관심 속에서 나는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보기가 어려웠다.


길을 걷던 중, 조그마한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아이가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었다. 두 아이는 아이는 천사처럼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안겨있는 애기는 유독 머리가 작고 어딘가 아파 보이는 느낌이었다. 동전 몇 개를 건네자, 그 사내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휑하니 뒤돌아섰다. 그 순간 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런 아이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길을 헤매다가 또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무조건 "노노노"를 외치며 올드델리의 복잡한 길을 헤쳐 나갔지만, 인상 좋은 한 인도인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가 이끈 곳은 다름 아닌 'Traveler's Information'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뜻밖의 보물 같은 정보들을 얻었다. 단순히 시티맵을 받으러 갔던 나는 인도 전체의 여행 계획, 효율적인 열차 동선, 그리고 꼭 가야 할 주요 관광지 등에 대한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커미션이나 별도의 비용이 들 줄 알았으나, 그런 것도 없었다. 함께 여행하던 동행과 나는 이곳에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인도 여행 루트의 90%를 확정할 수 있었다.


올드델리의 흔한 뒷골목 분위기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괜히 왔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실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인도의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여행의 시작은 화려함이 아닌 진실함이어야 한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이 문득 떠올랐다.


첫날 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씁쓸하면서도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 낡고 소박한 방에서,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땅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그리고 과연 이 모든 혼돈 속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인도는 이미 내게 첫 번째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작은 희망이었다.



2005.01.26 저녁에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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