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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Jun 24. 2022

[단편] 밤을 걷다

걷기도 벅차 기어가고 싶었다

J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었다.

직전 블록에는 가로등이 고장 나 있더니 넌지시 보이는 다음 블록 가로등은 곧 생명을 잃을 듯 회색에 가까운 주황색 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J는 그 가로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늘 J는 H와 헤어졌다.


햇볕 쐬기 싫어하는 둘은 적막한 밤거리를 거닐기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애초에 인적 드물고 코로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은 식당이 즐비한 J의 집 인근은 둘의 산책로로 딱이었다.

오후 9시가 되면 각자 슬리퍼와 가장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길을 나섰다. 특히 H의 회색 면바지는 밑단이 다 터졌을 만큼 낡았는데 대학교 1학년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샀던 바지랬다. 집에 훨씬 단정하고 통기성도 좋은 편한 바지들이 많았지만 J와 산책을 할 때면 거진 그 바지를 입었다.

처음 밤 산책을 했을 때 그 바지를 보고 J는 웃음을 참으며 바지 하나 사줄까 했으나 이내 바지를 사더라도 입지 않을 것을 깨닫고 그대로 두었다.

사실 J도 할 말이 없었다. J의 산책용 티셔츠는 남색에 목부분이 레이스처럼 쪼그라들고 천들이 두 겹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오버핏이 대세라며 한사코 고집해 입는 티셔츠였는데 사실 오버핏이라는 단어가 없을 때부터 입던 티셔츠였다.


J는 이제 혼자 산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점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둘 다 그리 말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있어 밤 산책은 무섭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중간중간 손을 끌었다 땀이 차서 자연스레 놓는 H의 손길도 좋았고, 한여름이면 편의점 앞에 앉아 각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좋았다. 매번 신상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H와 달리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면 항상 '뭐니 뭐니 해도 월드콘이지' 라는 오래된 광고 문구를 입에 달고 사는 J에게 H는 언제나 빙긋 웃으며 '그래 많이 먹어'라며 제일 안쪽 가장 차고 사람 손이 덜 탄 아이스크림을 꺼내 줬다.


한 달 전 둘은 경복궁으로 나들이를 갔다.


H는 J 전용 투어 가이드였다. J가 어디 놀러 갈까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 2, 3군데 후보지를 툭툭 내던졌다. 놀이터가 딸린 동네 공원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자리 잡은 카페까지 서울 경기권을 손바닥 안에 놓고 내려다보는 듯했다. 길치인 J는 H와는 어디든 마음 편히 갈 수 있었다.

그날은 하늘에 구름이 가득 꼈다.

집 밖을 나오면서부터 J는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집에 있자라고 약속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달이 났다.

오후 2시를 넘어서자 이슬 방울이 흩날리더니 금세 빗방울이 굵어졌고 어찌나 굵던지 어깻죽지에 떨어진 빗방울은 옷에 튕겨 귓불을 스치는 느낌마저 들었다.

둘은 부리나케 광화문 인근 빌딩으로 내질렀다. 숨을 고르며 눈에 닿은 찻집을 들어서니 각종 찻잎이 작은 유리 용기에 담겨 시향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둘을 주인은 방긋 웃으며 맞이해줬다.

창밖을 보니 지체 없이 실내로 들어오길 잘했다 싶었다. 빗방울은 그새 더 굵어졌고, 빌딩 유리창을 자세히 보면 창으로 내리찍는 빗방울과 튕겨 나오는 빗방울이 서로 부딪혀 표면이 안개가 서린 듯 뿌얬다. 허공을 자세히 보면 바람에 휩쓸린 물방울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처럼 하나의 결을 이루며 사선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J는 하필 오늘 비가 올 게 무어냐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투덜거렸다.

H는 다음에 또 오면 되지라고 찻잔 위 J의 손을 톡톡 두드려 줬다.

둘은 진심으로 다시 한번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J는 다 꺼져가는 가로등이 있던 블록을 지났다. 이전에 H와 같이 간 적 있던 맥주집이 나왔다. 아무도 없고 계산대 앞에 목에 장미모양 타투를 한 여자가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한 번 가고 다시는 오지 말자 했다. 특색이랄 것도 없는 크림 생맥주를 6000원에 받고 있었다. 밑에 깔린 맥주의 탄산을 지켜줄 만큼 쫀쫀한 크림도 아닌 그저 조금 더 밀도 있는 보통 맥주 거품 같았다.


둘의 만남과 호감은 교통사고 같았고, 헤어짐은 오전 8시 30분 회의 같았다.

부담스럽지만 반드시 치러야 했고 참석자들은 기운 없이 예민해져 있었다.


J는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서 H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둘은 아주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 만나는 자리에서 하하호호 잘 웃다 헤어진 자리에서도 어쩐지 H는 ‘괜찮아?’라는 말을 뜬금없이 던졌다. 그럼 J는 흠칫 놀라며 ‘어? 오늘 좀 이상했나’ 라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H는 J의 속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H에게는 두 마디 할 것도 한 마디만 하면 되었다.

때론 내 속을 훤히 알아줘서 한 마디 할 것도 서너 마디 푸념을 쏟아냈다.


하지만 둘은 어느 순간 타협점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헤어지기로 했다.

둘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고 그래서 헤어지는 게 맞는가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헤어져야 하는 일이 있구나라는 이해 못 할 말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J는 걷는 내내 생각했다.

이사를 갈까.

월드콘은 그만 먹어야지.

산책은 혼자 해야겠구나.


또 만날 수 있을까?

J의 속을 그렇게 꿰뚫어 보는 그래서 길 한복판에서 발가벗겨진 듯 자신을 얼굴 붉히게 만드는 이를.

H는 다음에 어떤 이를 만나게 될까.


새벽 1시가 되었다.

맥주 가게 불이 꺼졌다.

J의 마음도 깜빡였다.

그렇게 또 하나의 사랑이 사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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