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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양 11시간전

짝꿍이 국을 덜어주었다

사랑은 국자에 담기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한때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보석 같은 거라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가치가 높으며 대단한 거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사랑은 자갈 같은 거라고. 때로는 흙먼지 투성이고 흔하디 흔하게 발에 치여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거라고.



   어느 날 사랑이 말했다. “날 봐, 난 항상 여기 있어”


   

   그래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역시, 사랑은 자갈 같은 거였어.








   그날은 봄이 막 얼굴을 비칠락 말락 하여 공기는 차지만 하늘은 화창한 그런 날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강아지와 산책길에 올라 야트막한 산 하나를 타려던 참이었다. 산책이 길어질 것 같자 나는 문득 전날 짧게 끊은 동생과의 통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받은 동생도 마침 딸아이의 밥을 먹이고 산책을 갈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자매의 수다가 핸드폰 너머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처음에는 부쩍 옹알이가 늘어난 예린이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표현도 잘하고 고집도 생긴 예린이는 신기한 물건이 보이면 그걸 제 손에 쥐어줄 때까지 칭얼거린다고 했다. 딸은 감정 표현에 능하고 삐지기도 잘해서 하루 종일 수다를 들어줘야 한다는데, 앞으로 그런 예린이와의 티키타카가 기대된다며 걱정 반 설렘 반의 마음을 내놓는 동생이었다.


   일상, 고민, 일정 등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다가 돌고 돌아 우리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야기가 나왔다. 동생은 아버지의 죽음 후 잘 지내던 친구들과 멀어졌던 시기가 있다고 했다. 그건 왜인지 자신의 마음이 닫혀버렸기 때문이라고, 가족과의 이별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멋쩍게 말하는 동생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동안 많은 대화를 나눠 동생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나는 그동안 쉽게 드러나지 않던 동생의 깊은 마음 저변의 이야기가 매우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리 수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의 말을 처음처럼 진심을 다해 들어야 하는 건, 여전히 드러내지 못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어붙은 땅에서는 작은 불씨조차 소중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동안 우리가 이처럼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건 같은 어려움을 맞이한 가족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각자의 짐을 지고 한 줌의 온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 느꼈던 고된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두 자매는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그랬던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네”




   동생은 제부를 만나 연애를 했을 때부터 자신의 인생의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했다. 특히 그 점을 피부로 실감했던 사건은 제부와 결혼 후 1년 동안 공무원을 준비하면서였다고. 네가 하고 싶으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도전해보라는 남편의 응원이 정말로 아무 걱정 하지 않으면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1년 간의 시간이 되었을 때, 동생은 합격을 위한 본인의 노력조차 모두 제부의 덕으로 돌렸다. 그건 그만큼 고맙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냥 당연한 거라고 말하며 동생은 쑥스럽게 웃었다.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고, 자신에게 멋져 보이고 싶어 하며 자신과의 미래를 그리는 제부의 행동 전부가 그간 살아온 상처에 대한 보상이라도 된 듯 동생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고 했다. 그때 동생에게는 이런 생각 하나가 일말의 의심 하나 달지 않고 뚜렷하게 떠올랐다고 했다. “아, 사랑받는 건 이런 거구나”








   동생과의 긴 수다 후 전화를 끊었을 때 동생이 전해온 이야기가 따뜻하기만 해서 나의 마음이 몽실거렸다. 그러다 문득 내 일상 중 어떤 하루가 떠올랐다. 그날은 저녁시간 대였고, 짝꿍과 나는 오랜만에 국물 요리를 먹기 위하여 식당을 찾았다. 국물 요리가 보글보글 끓어 알맞게 익었을 즈음 짝꿍은 국자를 들어 나에게 먼저 국을 덜어주었다. 그건 표현은 거칠지만 속은 세심한 짝꿍에게 베여있는 아주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그 소소한 행동이 나에게는 문득 막연한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히 사랑에 대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때로 작은 것 하나에도 거창하게 묻어나곤 했다.










   얼어있는 땅 위로 피어난 새싹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건 또한 얼었던 세월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소중함일 것이다. 쉽지 만은 않았던 우리가 지나온 세월이 지금에 와서도 절대적으로 쓸모를 다하는 이유는, 현재를 더욱 따뜻하고 찬란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종종 사랑을 놓쳤다. 그러나 자주 사랑을 찾아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았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고. 짝꿍이 전해 준 국자가 사랑을 말해온 것처럼 사랑은 언제나 치이 듯 그곳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건 찾아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두 자매의 마음을 몽실하게 한 건, 그래서 마침내 인생이 살만해졌다고 느끼게 한 건, 두 자매의 옆에 있어준 한 사람씩이 전해 준 사랑 덕분이었다. 그리고 함께 지나온 칠흑 같은 세월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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