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영화 ‘유브갓메일’여주인공 캐슬린은 동네에서 자그마한 아동 서점을 운영한다. 그곳에는‘Storybook Lady’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파티햇을 쓴 캐슬린은 아이들의 눈을 맞추며 나긋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준다. 누구하나 흐트러진 모습 없이 모두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를 접했던 젊디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나의 머리 속에는 늘 이 한 장면이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도 플라워패턴의 폭신한 패브릭 쇼파에 앉아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된 나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다. 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 같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건 무엇일까? 라고 가끔 나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선명하게 나오는 대답은 ‘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책 읽어 주는 부모가 책 읽는 아이를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책과 함께 자랐으면 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지만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책 읽어주는 이 시간이 엄마인 나에게도 참 좋다.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귀찮고 힘든일이라기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엄마, 이 책 읽어 주세요.”라며 아이가 직접 고른 책을 내밀면 난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나의 무릎에 앉힌 채 책을 읽어 주었다. 엄마 무릎 학교가 열린 시간잉 그 보다 더 급한 일은 없기에, 아이가 책 읽어 달라고 하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알기에 나의 몸과 마음이 먼저 아이로 향했다. 아이를 품안에 안고 살갗에 부딪혀 가며 한 읽기 활동은 아이들도 나도 가치 있는 시간으로 자리 잡아 있다.
하루 중 틈틈이 책을 읽어 주지만 특히 잠자리 독서는 낮과는 다르게 우리의 말과 이야기 그릇이 커지는 시간이다. 읽는 것을 매일 습관적으로 읽다 보면 책을 계속 읽어 줄 수 있는 근력이 생긴다. 글을 매일 쓰면 필력이 키워지듯이 책 읽어 주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피곤한데 내일 읽어줄게’, ‘엄마 목이 아프니 내일 읽어 줄게’온갖 핑계를 대며 책 읽어 주기를 게일리 하게 되면 어느 순간 책 읽기 행위는 하기 싫은 일의 무게로 무겁게 다가온다. 목이 아프면 읽을 책의 권 수를 줄이면 되고 몹시 피곤한 날은 짧은 글이 담긴 책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나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아이들이 있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 줄 수 있었다. 책을 읽어 주게 되는 강력한 동기는 아이들의 몸짓, 눈짓도 한 몫을 한다. 아이들에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숨넘어 갈 듯한 웃음 소리와 엄마의 목소리가 칼칼해지기라도 하면 바로 따뜻한 물 한잔 내어주는 아이들 마음이다.
밤 독서 도서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것은 세계문학이나 고전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혼자 읽기 보다는 엄마가 읽어주며 함께 이야기 나눈다. 책 읽기의 시작점은 표지에 나온 제목과 인물들의 그림을 살펴 보는 것이다. 그림으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요소가 많기에 표지는 중요하게 살핀다. 보통 8-10개로 나누어져있는 에피소드는 매일 하나씩 읽어 준다. 읽어 주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는 분량이다.
밤 독서에는 여러 책을 동시에 읽어주기에 문학 책이나 고전은 한 권을 다 읽어 주기 보다는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도록 읽기를 멈추었다. 아이들은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며 더 읽어 달라고 조르지만 그럴때마다 아주 밝은 목소리로 다음에 나오는 제목을 읽어주며“다음 시간에 또 만나요”하면서 책을 덮는다. 책의 결말 부분을 들려 주지 않고 마지막 부분을 아이가 완성할 수 있게 한 괴테의 어머니 카타리나처럼 나 역시도 뒷 이야기를 잠들기 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도록 살포시 놓아두고 아이들 방을 나선다.
아이들은 이야기에 담긴 내용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땐 바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엄마표 설명이 덧붙여지면 어려운 책을 마주해도 문제 없다.
빨간 머리 앤을 읽어 줬을 때 일이다. 처음 매슈를 만나 마차타고 가는 가로수길이 멋없다며 앤은 아름다운 풍경에 걸맞는 ‘기ㅡ쁨의 하얀 길’이라 지어주는 장면을 읽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마다 멋진 새 이름을 붙여주는 앤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우리는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그림 속 가로수길을 보며 이름을 지어 보았다. 아이들은 ‘내 길’, ‘물 꽃의 길’이라는 이름을 지어 즌다. 아이들은 단순히 듣기에만 그치지 않고 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시간을 갖는다. 빨간 머리 앤을 읽는 동안 아이들은 차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길들에 이름을 남겨 주는 놀이는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책 읽기 뿐만 아니라 엄마의 입말에서 나오는 볼품 없는 이야기마저 무척 사랑해준다. 이 시간에는 엄마의 이야기가 살아 있다.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간 숱한 이야기들을 만난다.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로 가사를 만들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러주면 아이들을 배꼽을 부여잡고 침대를 뒹군다.
어느 날은 엉성한 이야기를 들고 밤 여행을 떠난다. 이때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옛날 옛날에 00라는 아이가 살았어요.”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동안 읽은 책 속의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 유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결코 엄마의 이야기를 재미없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질서 없이 쏟아냈더니 어느새 이야기꾼 엄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일단 뭐라도 말하자. 이야기를 다듬지 않고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만 즐거우면 된거다. 우리만 아는 이야기가 매일 밤 하나씩 쌓여 가고 있다. 내일은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야기 소재를 찾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