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마지막 50일
딱 50일 전이었다.
아내와 여행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집에서 저녁 모임을 가졌다. 아빠와 엄마, 동생네 부부 그리고 나와 아내까지 모두 모인 가족 모임이다. 결혼 전에는 쉽게 모일 수 있던 가족 모임이 결혼 후에는 가족이 늘다 보니 밥 한 끼 다 같이 먹기 쉽지 않다.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이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니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했다. 여행의 나른함이 있었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다는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데 그날, 아빠가 이상했다. 늘 끼니를 챙겨 ‘삼식이’라 불리었던 아빠인데, 거의 밥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늘 식사 자리에서 빠지지 않았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다양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주도했던 아빠는 그저 우리가 먹는 모습만 멍하니 지켜보았고, 이따금 표정도 좋지 않았다.
“아빠, 어디 아파?”
“아냐”
무뚝뚝한 아들인 내가 말을 건네도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다”라고 할 뿐이다. 사실 밥을 안 드신다는 아빠를 아내와 억지로 방에서 데리고 나와 식탁에 앉혔는데 영 입맛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시간 내내 아빠는 표정이 어두웠다. 모임이 끝나고, 평소와 다른 아빠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고, 아내는 “아버님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아”라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엄마의 전화는 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아빠가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해”
평소 소아마비로 걷기가 불편했던 아빠는 그날 아침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면서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놀란 나는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다시 괜찮아질 거다”라며 병원에 절대 안 간다는 이상한 고집을 피웠다. 걱정된 이모들이 집으로 찾아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아빠가 끔찍이 생각하는 ‘며느리’, 아내가 등판했다. 나와 아내는 퇴근 후, 아빠에게 “내일 병원을 가자”고 설득했고 아빠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그날,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몸 이상에 대해 아빠도 무서웠고, 그나마 장남인 내가 같이 가는 걸 더 원했던 것 같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집 근처 응급실로 향했다. 아빠를 부축해 병원에 들어가는데, 아빠의 걸음 속도가 너무 느렸다. 엄마와 나는 아빠보다 앞서 걸으며 “왜 이렇게 느리게 걸어, 빨리 걸어”라며 재촉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병원 직원이 “불편해 보이는데, 휠체어에 앉히세요”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아빠는 환자인데, 우리는 아빠에게 그동안 배려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내가 그동안 아빠에게 배려한 적이 있었나 되짚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배려받는 것 투성이었다. 아빠는 내가 밀어주는 휠체어 의자를 타니 표정이 좋아졌다.
코로나19로 인해 병원 출입이 삼엄해지면서 엄마는 보호인 자격으로 아빠와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돌아가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큰 병이면 어쩌지’, ‘아냐, 그래도 표정은 좋았어’, ‘작년에 건강 검진해줄 걸’
온갖 후회와 걱정들 뿐이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빠는 폐암 3기였다.
폐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본인도 모르게 악화되는 병이다. 아빠는 오래전, 담배를 끊었지만 그만큼 오래 피웠다. 아빠는 담배를 끊었기에 폐암은 예상 못한 눈치였지만 덤덤했다. 나와 가족들은 충격이었다. 뉴스나 다큐에서만 보던 암 환자가 아빠라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장 아빠가 해왔던 사업을 정리해야 했고,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만 한다. 아빠의 사업 정리를 위해 거래처를 돌아보니 사장님들은 하나 같이 “사장님이 너무 힘들어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혼술’하며 하루를 마감했던 아빠에게 왜 나는 “아빠, 힘들지?”라는 위로를 건네지 못했을까,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아빠는 폐암 3 기지만 희망은 있었다. 의사에 따르면 악성 암 종류는 아니고, 치료 방법도 다양해졌기 때문에 환자만 버틴다면 항암은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작은 희망을 잡기로 했다. 그 어떤 돈과 시간이 든다 해도 아빠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는 첫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시급했던 뇌종양을 성공적으로 제거했고, 첫 방사선 치료까지 해냈다. 희망이 더 커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 아빠는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면서 조금씩 걸었던 것도 걷지 못하게 됐다. 계속 아빠 곁을 지켜왔던 엄마는 자꾸만 악화되는 아빠의 모습에 눈물이 많아졌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내 마음은 복잡해졌고, 자꾸만 줄어드는 희망은 우리 가족을 괴롭게 했다. 아무도 없는 부모님 집을 찾아갔다. 평소 불이 환하게 켜져야 할 집은 어두웠다. 집은 그대로인데, 온기가 없다. 그동안 우리 집은 행복한 일 투성이었다. 내 결혼에 이어 동생도 결혼했고, 이제 동생은 곧 예쁜 공주님까지 낳을 예정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암은 행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빠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침대 위 아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보이는 피 묻은 휴지.
이상한 생각에 아빠가 자주 앉는 곳들의 쓰레기통을 뒤지니 피 묻은 휴지가 줄줄이 나왔다. 알고 보니 아빠는 이미 훨씬 전부터 객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이 아픈데도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본인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책하며 울었다.
그 사이, 병원에서는 아빠를 포기했다. 아빠의 체력이 항암을 견디기 힘들다는 이유였고, ‘호스피스’ 치료를 권유했다. 아빠는 집으로 가길 원했다. 강했던 치료의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자꾸 “이제 놓아달라”라고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도 아빠와 씨름했던 엄마는 집에서도 아빠의 모든 신경질을 다 받아냈다. 아빠의 증상은 악화되어 하루 1식도 힘들어했고, 숨소리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건 통증이었다. 통증만은 없었던 아빠가 수시로 온몸이 아프다고 했다.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나와 임신 중인 동생이 없는 가운데서 엄마가 감당하기엔 힘든 아빠의 병 수발은 상상 이상이었다. 설상가상 아빠는 걷지 못하기에 대, 소변도 기저귀에 받아내야 한다.
나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다시 한번 치료를 시도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의 유명한 병원이 치료를 포기했다고 가족이 포기할 순 없다. 집 근처 병원으로 가 아빠의 암을 발견했던 교수에게 입원 치료를 간곡히 부탁했다. 아빠의 체력을 끌어올려 조금이라도 항암치료를 더해 계속 희망을 이어가고 싶었다. “죽고 싶다”던 아빠는 나와 아내의 설득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집 근처니 아빠의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변수는 동생의 출산이었다. 아빠를 계속 지켰던 엄마는 동생의 산후조리를 돕기로 했고 내가 장기 휴가를 내 아빠 간병인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만 아빠의 입원을 늦춰서라도 아빠에게 동생이 낳은 첫 손녀를 안기고 싶었다. 병원 측에 양해를 구해 아빠는 예정된 입원을 하루 늦춰 손녀를 볼 수 있었다. 아빠는 아기를 참 좋아했다. 손녀를 보자, 아빠는 온 힘을 다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빠는 길고 긴 싸움의 시간을 맞았다.
병원에서는 아빠의 항암 치료를 위한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치료 방법들을 고안했지만 아빠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처음에는 없었던 산소호흡기를 꽂고, 소변줄까지 차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일부러 아빠에게 “별 거 아냐”라며 힘을 주려 했지만, 아빠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치의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동안 참았던 내 감정이 터져버렸다. 아빠가 마음 약해질까 봐 괜히 더 강한 척하며 꾹 참았는데, 주치의의 한 마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빠를 뒤로 하고 복도에서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녔지만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그냥 오직 아빠 생각만 났다.
‘고생만 했던 아빠를 지키지 못했구나’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불가능했지만, 병원 측의 배려로 가족들이 잠깐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아빠가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빠는 펑펑 우는 가족들 앞에서 의연하게 “괜찮다”며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아빠는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갔다. 아빠는 계속 “온몸이 아프다”며 괴로워했지만 이내 “내가 이것도 못 이길까 봐”라며 어떻게든 눈빛을 또렷한 눈빛을 잃지 않으려 했다. 나는 아빠에게 “아빠, 조금만 참아. 이길 수 있어. 이겨서 집에 가자”라고 했다.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빠 얼굴을 보면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아빠가 정신이 또렷할 때 "사랑해"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 말을 하질 못했다. 나는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다음 날, 동생 산후조리를 도왔던 엄마가 나 대신 간병하기로 했고 나는 그렇게 아빠와 헤어졌다. 더 있고 싶었는데 나도 회사를 다녀야 했다.
"아빠, 또 만나"
아빠는 나와 눈을 맞추며 눈인사를 했다.
"괜찮아"라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내가 위로해야 하는데, 내가 위로받았다.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와 아빠는 하루를 더 힘겨운 싸움을 했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왔다.
"빨리 병원으로 와"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병원으로 갔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나는 이렇게 슬픈데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화로웠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녹음이 짙은 평화로운 5월의 오후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들을 뒤로하고, 아빠와 마주했다.
그 사이 눈에 띄게 야윈 모습과 초점 없는 눈, 여러 기계들이 아빠를 둘러쌌다. 하루 사이에 아빠는 너무 변해버렸다. 정말 이제 작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간호사는 "목소리는 들을 수 있다"라고 했다.
나는 아빠 귓가에 용기 내어 말했다.
"아빠, 사랑해. 아빠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어. 고마워"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손 잡고 사랑을 이야기했다.
아빠는 그렇게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세상을 떠났다.
아빠와 난 36년을 함께 했지만, 지난 50일은 36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왜 아빠는 아픈 걸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그동안 아빠를 배려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도 사랑일까 싶다.
이상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