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마지막 50일
엄마는 아빠가 폐 조직검사를 하는 며칠 동안 간병을 하기로 했다.
당시는 코로나19가 절정인 시기였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층 강화되면서 간병은 오직 1명, 면회도 금지되었으니 여러모로 걱정되었다. 아빠가 암이라는 정신적인 충격을 추스리기도 전에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빠와 함께 해야 한다. 아빠는 아직 본인이 암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한달음에 달려와 엄마와 나를 위로해 주었던 이모부 내외는 엄마가 병원 들어가는 길까지 함께해 주셨다. 슬픔을 함께해 준다는 가족들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하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엄마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빠 곁으로 향했고, 이모들은 "도우야, 많이 힘들겠다. 아빠를 위해서 좋은 병원들 알아보고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라며 진심 어린 조언들을 해주셨다.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어깨에 짐들이 조금은 녹아내린 느낌이었다.
그날 밤, 난 와이프와 함께 폐암 치료로 유명하다는 병원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빨리 치료를 할 수 있고, 집에서 가까워야 한다. 관련 카페와 기사들을 찾아보며 비교한 결과, 후보 병원은 아빠가 다니고 있는 삼성서울병원,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좁혀졌다. 더 범위를 넓히면 서울아산병원이나 신촌 세브란스병원까지 생각했으나 너무 예약이 어렵거나 거리가 먼 게 흠이었다.
생각해보니 실력 있는 교수도 중요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쉽게 결정하기 힘든 문제였다. 우리 가족 중에 암은 처음이라 어떤 결정이 현명한 건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 사이, 사촌 형들이 유명하다는 병원들을 추천해주었다. 머릿 속은 더 복잡해졌지만, 한 가지 사실은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빠를 살려야 해'
다음 날, 휴가를 내고 병원 앞에서 엄마와 점심을 하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을 엄마가 걱정되어 뭐라도 점심을 사주고 싶었다. 마침 아내는 이직이 결정된 회사와 간단히 미팅만 하는 날이라 함께 할 수 있었다.
아직 아빠의 폐 조직검사 결과는 안 나온 상황이지만, 우린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이야기했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생각보다 겉모습이 멀쩡하고, 암 환자 같지 않다고 했고 나 역시 "요새는 의학 기술이 좋아서 완치율이 높대. 우리가 잘 도와주면 나을 수 있을거야"라고 확신했다. 아내도 "암 종류에 따라 완치될 수 있는 약도 있대요"라며 거들었다.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니 굳어졌던 우리 셋의 표정도 조금씩 풀어졌다. 왠지 결과도 좋게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당장 아빠와 엄마의 생계가 걱정이지만, 일단 암 진단을 받았으니 아빠가 들어놓은 보험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필요하면 우리 부부가 일정 부분 금전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다. 엄마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병원에 들어갔다.
이제 아빠의 조직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그날 오후, 떨리는 목소리의 엄마 전화를 받았다.
아빠는 폐암 4기(선암/비소세포암)였다. 사실상 암 말기 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