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말이 없음
유년 시절 첫 기억은 마당가를 서성대다 강아지와 닭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거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지만 4살 때까지 나는 말을 못 했다고 한다. 어쩌면 첫 아이라고 어른 들 손에서 손으로 자란 데다 입성까지 짧아 늘 비실거렸기 때문일 테다.
말이 적다. 아니다. 가족에게나 친구들에게 굳이 말을 않고도 지낸 것이 중학생이 되고도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생각은 늘 많았으며 혼잣말하기를 좋아했다. 집에서는 내 뜻대로 한 것 같은데 대문을 나서면 또래들과 어울리는 데는 서툴렀다. 게다가 약골이고 보니 뭐든 하다 보면 뒤로 처지니 그 불편한 느낌이 싫었다.
마음속 생각이 그렇다 보니 점점 말은 줄어들어갔다. 집에서는 남동생 셋이 누나인 내 말이 떨어져야 물건을 자유로이 만질 만치 서열이 분명했다. 꼭꼭 숨겨둔 학용품이 줄거나 문제가 생기면 단박에 전부 호출이 되어 탐색전이 시작되곤 했다. 하지만 그 서열 순위가 이내 뒤바 낀 걸 아는 건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한마디로 세발자전거 점령을 끝으로 나는 서열 1위에서 꼴찌로 밀려났다.
학교에 들어가서 집중 교육과 관심받기가 동생이 입학하기도 전에 사고로 한번 축이 난 데다가 나는 집에서 열심히 하고 가도 백점 맞기가 겨우 이뤄졌는데 동생은 실컷 놀고도 시험만 치면 곧잘 백점을 맞아 왔다.
건강하게 잘 뛰어노는 데다가 공부까지 추월해 버린 것이다. 뒤이어 태어난 동생들도 제 형과 같이 노느라 누나인 난 늘 조심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인가?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될 듯하다가 그리 돌아가지 않으니 말문을 닫은 걸까? 원인도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서서히 집안에서도 말을 않고 지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의 구름과 대화를 하고 있고 또 들판의 꽃과 풀들에게 말을 붙이고 있는 나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고도 내겐 친구가 없었다가 3학년이 되어 이모네로 옮겨서 학교를 다니던 중에 이모네 근처에 살고 있던 친구의 친절하고 예쁘고 상냥한 모습에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려 말을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내 의사 표시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내 생활기록부에 새로운 단어가 들어간 계기가 되었다.
그때 갓 초임으로 발령을 받은 담임선생님께선 안동이 고향이라고 하셨다. 순수하고 또 엉뚱한 면도 있었다. 막 사춘기에 진입한 친구들은 그 선생님 놀리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어 심심하면 장난을 했다. 학교 반 표를 바꾸어서 헷갈리게 하거나 심지어 어떤 날은 수업날에 모두 교실을 비우는 엉뚱한 해프닝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런 중에도 총각선생님이란 이유 하나로 무조건 좋아하는 짝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께서 방학을 마치고 첫 등교날에 어느 친구가 보낸 편지를 들고 오셔서 공식적으로 읽고는 창피를 주셨다. 그때 그 상황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당번이어서 분필 지우개를 털고 있다가 복도에서 선생님께 말을 건넸다.
"선생님, 오늘 아침 그 일은 선생님께서 잘못하셨어요. 따로 교무실에 불러서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반 친구들 앞에서 공개해서 어떻게 도움이 되겠어요? 친구는 마음만 더 아플 것이에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나를 빤히 보시며 말했다.
" 너도 말을 할 줄 아네? 네 말 듣고 보니 그렇네. 내가 잘못했구먼, "
"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 제자를 생각한다면 다시 불러서 사과를 해야 하지요. 그래야 상처를 덜 받지요." 했다.
그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나는 담임 선생님께 평소와 달리 말을 한 것도 의외지만 나도 몰래 튀어나온 말은 선생님을 무척 당황하게 해 드렸다. 그 후 맨 앞에 앉아 있던 내가 방학 동안 키가 커지면서 두 번째로 옮겨갔다가 시력이 나빠진 친구와 또다시 자리 교체를 한 통에 중간쯤 앉게 되었다. 그런데도 담임 선생님께선 종례시간이나 수업시간에 종종 내 이름을 불러서 질문하거나 칠판에 생뚱한 시를 지어놓고 해석을 해보라고도 하셨다.
그해 내 생활 기록부엔 ~ 그러나 말이 없음.'에서 '평소에 조용한 편이나 꼭 필요한 말을 조리 있게 자산의 뜻을 전한다."로 바뀌었다.
그것은 내 생에 첫 기적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