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처럼 3

혹성 탈출

by 하리

중3이라 책을 펴놓고 있지만 귀는 바깥으로 향했다. 잠시 뒤 철 대문 삐꺽 대는 소리에 이어 이모네 큰 방문 소리가 들리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도 방을 나섰다.


연속적인 주말 영화시간이었다. 지난주에 이어 어떻게 전개될지도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말없이 와 있다가 조용히 나가는 그 아이였다. 그 아이가 어느 날 자전거에다 사촌 동생들을 태우곤 집 앞 논을 이리저리 돌다가 웃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였다.

드라마 제목은 혹성탈출이었다. 인간 세상이 망하고 원숭이들이 지배하면서 인간이 원숭이처럼 두뇌가 나쁜 존재가 된다는 먼 미래의 지구 상태였다. 상상의 세상이 텔레비전에서 펼쳐지면 마음은 나도 몰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아마도 현실을 벗어나는 얼마 간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묵묵히 각자 방에서 열심히 책을 파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면 다가올 앞날이 적어도 부모님보다는 나을 것이란 희망을 갖고 떠나온 집이었다. 그런데 집중이 잘 안 된 채 하루하루가 피고 졌다. 무언지 표현 못한 들뜸이요, 몽롱함이었다.

그러구러 여름 방학이 되었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니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도 말을 잘하지 않다가 더 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늘을 보면 구름이 흘러갔다. 그 모양이 부푼 목화솜 같다가 때론 비를 함빡 머금은 먹구름으로 바뀌곤 했다.

잠자리 잡다가 감나무에 올라가 쉬곤 해도 어느 날은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한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늘 따스한 밥에 갖가지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 주던 이모도 밝게 뛰놀던 사촌 동생들도 아닌 바로 그 아이의 뒤통수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불쑥 작은 체구로 자전거를 잘 타던 그 아이 모습이 떠올라서 한여름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삼십 리 황톳길을 자전거를 타고 갈 용기를 냈다. 어둡기 전에 오면 되겠거니 하고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가까스로 발이 닿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로 나갔다,

구불한 신작로길을 타다 걷다 오르락내리락 얼마쯤 갔을까? 처음 먼 길을 달려온 나와 자전거는 그야말로 기진맥진했다. 저 멀리 이모네 집이 있는 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혹시나 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뜨거운 해를 피해 쉬고 있는지 사람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모네도 평소에는 손님들이 오갔는데 그날따라 조용했다.

그만 맥이 풀렸다. 땀 뻘뻘 흘리면서 간신히 왔건만 내심 보고팠던 그 아이는 어디 있나? 공부를 하는 걸까? 냇가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나? 실망이 온몸을 덮칠 대쯤 대문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그때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 아이는 이모네 대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나무 막대기로 바닥에다 뭔가를 써다 말고 후다닥 일어나 자기 집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인사도 못 건넸다. 허탈했다. 다시 돌아오는 내내 자전거는 무겁고 잘 나가지도 않아 연신 비틀거렸다.

여름 방학에도 '혹성 탈출'은 계속 방영되었다. 허지만 더 이상 그 아이와 난 한 방에 있질 못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른들이 먼저 눈치를 챘다. '공부해야지' 하며 텔레비전이 있는 큰방 출입에 제동을 걸었다. 어쨌거나 잘 안 되는 공부라도 해야 했다. 대신 언제까지 불 켜고 있는가 살피느라 조심스레 창을 열고 길 건너 그 아이 방의 봉창을 살폈다.


뿌득 뿌득 계절은 바뀌고 해도 바뀌었다.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닌 것처럼 키마저 훌쩍 커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달리 기적처럼 용기 냈던 그날과 '혹성 탈출'은 아주 가끔 켜지 않은 텔레비전을 뚫고 불쑥 튀어나와 나를 흔들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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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