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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은 Apr 15. 2023

나에게 임신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쯤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될까


서울 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터미널에 유명한 카페가 보였다. 워낙 빵을 좋아하는 시누이와 여동생이 생각나서 맛있는 빵을 몇 개 골랐다.


다음 날, 빵을 전해주기 위해 남편과 함께 시댁을 방문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갑작스레 남편 회사에서 호출이 왔다.

휴일이었지만 회사에 급한 문제가 생겨서 갑작스럽게 바로 출근해야만 했다. 이미 빵을 전해주기로 마음먹었고, 미리 운을 띄워놓았던 게 있어서 안 주기도 애매했다.

어쩔 수 없이 나 혼자라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날은 올해 첫날. 새해 날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적어보려고 마음먹는다.






사실, 시댁을 나 홀로 방문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시댁과 친정이 모두 매우 가까운 동네(30분 내외)에 살고 있어서 나름 자주 왕래 하는 편이다.

 

큰 마음을 먹고 패딩 모자를 둘러쓰고 꽁꽁 싸매고 (쌩얼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방문한 시댁에서 아버님으로부터 당황스러운 한 마디를 들었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냐. 올해는 꼭 만들어야 한다... 뭐가 잘 안 되냐?"


최대한 좋은 말투로 표현을 하고 싶지만, 표준어를 쓰시는 서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사투리일 수 있는데, 원래 말투가 그러시긴 하다. 워낙 표현이 서툴고 말투가 상냥한 편은 아니셔서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처음엔 주어가 없는 아버님의 한 마디에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해 3초간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옆에서 시누이가 "요즘은 그런 말 하면 안 돼. 못 들은 걸로 해요"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뻔했다.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장 보러 나온 길에 들렸다고 말씀드리곤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원래도 빵만 전해주고 올 생각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그때 내가 아픈 사실을 하루빨리 시부모님께 털어놓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때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이후 남편이 따로 시댁을 방문하여 나의 질병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애써 태연한 척 고비를 잘 넘기고 서둘러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니,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 시댁에서 별말씀이 없으셔서 몰랐지만,, 은연중에 바라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아버님의 '뭐가 잘 안 되냐..'는 그 한 마디가, 마치 내 잘못인 것만 같아서,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못내 서러웠다.



이러한 나 혼자 알게 된 마음의 짐을 친구에게 털어놓자니, 나의 아버님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아버님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게, 또 막상 그런 말은 듣기가 싫었다. 나보다 더 상처받아하실 가족들에게는 차마 절대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를 어떻게 꾹 참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려고 누웠을 때 옆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넌지시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아마도 표정이 일그러질 것 같아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자신은 없었던 것 같다.


남편이 그동안 내게는 숨기고 있었지만 아버님께서 몇 번 남편에게 임신 계획에 대해 묻고 계셨던 것 같다. 남편이 내년을 계획 중이라고 이야기하며 넘어갔지만, 제대로 전달이 안 된 탓인지, 아버님만의 표현법으로 내게 전달을 하셨던 것이다.


아버님께서 나쁜 뜻으로,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때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 병을 진단받았을 때보다 더 서러운 마음이 지속되는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내보고 싶었다…






루푸스를 진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루푸스 활성기인 나 같은 환자에게 임신은 치명적이다. 임신 중에 루푸스가 더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의료진과의 상의 하에 계획적인 임신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환우분들 중에도 출산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분들도 아주 많겠지만)


나의 건강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는 내 건강 상태가 최선일 때, 임신 준비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임신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주치의를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 상황이 못내 나를 더 서럽게 만들고 만다.


내 건강을 위해 다니던 직장을 포기하고 치료에 전념했을 때, 단백뇨를 잡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단백뇨를 잡고 나니, 나는 또 그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백뇨를 잡자마자, 조심스럽게 임신 여부에 대해 교수님께 질문을 드렸다. 올해로써는 처음 용기 내어 질문한 부분이다. 사실 작년 하반기에도 여쭤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루푸스 신염(신장염) 진단을 받으면서 여쭤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임신 준비로 인해 갑자기 단백뇨가 활성화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면역억제제를 3년 정도는 더 복용하며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복용하고 있는 면역억제제 (마이렙트정, 셀셉트)는 기형을 유발할 수 있는, 임산부 금기 등급 2등급 약이다.)


고로, 나는 앞으로 3년 정도는 임신 준비를 할 수 없다는 말…? 교수님은 정확한 시기를 말씀하시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셨다. 우선은 좀 더 지켜보자고 말씀하셨다.



임신에 대한 가능성이 더 멀어질수록 점점 나도 모르게 불안해져 간다.

임신은 할 수는 있을까?

나도 모르게 요즘은

아이는 꼭 낳아야 할까?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주변에서 임신 계획에 대해 물으면,

나는 더 이상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임신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나는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되었어'

'조금 더 신혼을 즐기고 싶어'


언제쯤이면 나도 용기를 가지고

내 질환을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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