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프로그램을 떠나보내며

by 지윤


모든 게 다 새로웠던 입사 초반. 현타보단 설렘으로 가득찼던 시간들에 친구들에게 유독 자주 들었던 말은,

"넌 계속 좋아하는 걸 하네", "너가 하는 일 재밌어 보여" 같은 말들이었다.

방송이나 콘텐츠 쪽 일이 워낙 폐쇄적이기도 하고, 외부에서 봤을 때 환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일이라 더 그런 시선들이 많은 것 같기도 했다. 꾸준히 방송 외길이었던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좋아하는 일을 실제로 하고 있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감이 된다는 게 좋았다.


작은엄마한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안한 시기가 길어지다보면, 현실과 타협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래도 계속 하고 싶은 걸 밀고 나가다 보니 정말 해냈다고. 그게 참 대단하고 멋지다고. 그 말이 참 좋았다. 불안해도 흔들리지 않고 내 길을 가는 힘을 나보다도 더 먼저 나에게서 봐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든든했다.


여전히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내 이름을 보는 일은 좋았다. 근데 사실 더 좋았던 건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사람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 이 프로그램에 애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정말 좋은 자극을 줬다. 방송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시너지를 일하면서 너무나 많이 느꼈다. 그냥 단순하게 넘길 수 있는 일도, 애정을 담는 순간 결과물이 바뀐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고, 어떤 태도로 일을 대하는 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에너지가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결과물을 내고 싶어 고민했던 마음들이 모여 더 멋진 성과를 낸다. 태도가 정말로 전부다.


그렇게 3개월을 쏟아부었던 내 첫 프로그램이 끝났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맡은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애정이 더 남달랐는데 끝나니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첫 녹화때는 참가자들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상태였고, 전 시즌을 안봐서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했다. 평소 클래식에 관심이 있던 편도 아니라서 더 어려웠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게 매회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다. 매주 금요일 종편실에 상주하며 타채널에 송출도 하고, 음원도 발매했다. 제작진과 논의해서 이런저런 이벤트들도 많이 기획해보고 진행했다. 디지털팀과 협업하며 광고도 돌려보고, 팬 플랫폼 운영부터 투표까지 정말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결승 파이널주까지 나를 괴롭히던 크고 작은 투표 이슈들과 계속 이슈 모니터링을 하느라 일하는 건지 쉬는 건지 분리가 되지 않았던 연휴까지.


회사 내부에 디자인 팀은 물론 디자이너 하나 없어서 마케터인 내가 디자인까지 해야했다. 사실 그 전 회사에서도 그래왔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여전히 내 디자인 실력에 자신이 없었다.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해야 하니까 했다. 투표 페이지부터 이벤트 페이지까지 기획과 디자인, 실행과 마무리까지 모두 내가 했다. 컨펌이 많길 바랐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아서 괴로웠다. 내 눈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데 좋다고 하니까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팬들이 이벤트에 재밌게 참여하면 팬들의 댓글을 보는 낙이 있었다. 역시 난 각자에게 의미가 생기는 순간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대학생 때 맨날 다니던 신촌 거리에 프로그램 광고가 걸렸을 때 기분이란. 새삼 팬들의 화력에 놀라고 프로그램의 영향력을 실감했던 순간들이었다. 좋아하고 응원하는 가수를 위하는 팬들의 마음을 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이제 팬의 입장이 아닌 기획자와 담당자의 입장이 되었다는 게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보통 촬영은 온에어 시점보다 훨씬 전부터 하기 시작해서, 후반부에 갈수록 촬영과 온에어 시점이 점점 줄어드는 구조이다. 세미파이널때부터 일반 방청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400석 정도의 작은 규모로 방청을 받았다. 그리고 결승 파이널 때는 2500석이 넘는 규모였다. 일반 방청과 초대권으로 정말 많은 분들이 모여주셨다. 프로그램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한 곳에 모여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는 그 날이 나에겐 큰 울림이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든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용기가 되고, 또 위로가 되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에겐 입사 후 3개월이었지만, 참가자들에게는 무려 11개월이라는 긴 시간이었던 만큼 그동안의 노력들이 느껴져서 찡했고, 이런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현장에서 같이 생방송을 지켜보며, 같이 투표결과에 조마조마하며, 응원하던 팀이 결국 우승해내는 걸 보고 벅차올랐던 순간들.


그렇게 3개월의 여정이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밤늦게까지 진행된 결승 생방송이었지만 다음날인 토요일도 출근을 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타채널 담당자님과 마지막 업무 연락을 하는데 정말 끝이구나 싶어 아쉽기도, 후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과의 인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프로그램의 여운을 즐길 수 있는 갈라콘서트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었다.


keyword
이전 04화콘텐츠 업계 관계자가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