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로 세탁기나 바꿀까?”
명절 보너스가 들어온 날,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1년 중 며칠 없는 날이죠. 평소 같으면 남편 얼굴이 그다지 예뻐 보이지도 않는데, 오늘만큼은 다릅니다. 아무 말 없이 “알아서 써”라고 말해주는 모습이 어찌나 든든해 보이던지요.
머릿속은 금세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10년 넘게 써온 세탁기, 멀쩡하긴 한데 디자인도 구식이고 요즘은 세탁,건조 일체형이 대세라더군요. 눈길이 갑니다.
“아니지, 요즘 집에서 제일 많이 쓰는 건 TV 지.” 요즘 들어 눈이 침침해진 건지, 화면이 작아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큰 화면 TV를 장만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스칩니다.
“아니다. 제일 많이 쓰는 건 역시 냉장고잖아.” 네 식구가 쓰기에 냉장고가 작은 듯해, 하나를 더 들이고 싶은 마음도 올라옵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후보들을 저울질하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보너스 줬어?”
갑자기 딸아이가 튀어나왔습니다. 남편이 슬쩍 흘린 모양이죠. 어휴, 입이 방정입니다.
“엄마엄마, 그러면 이번에 다 같이 해외여행이라도 가요.”
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해외여행이라니, 그런 사치가 우리 집에 꼭 필요할까요?
“얘는, 우리가 부자도 아니고...”
“아니, 요즘은 다들 해외여행 다녀요. 꼭 부자만 가는 법이 있나요?”
딸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제 귀엔 달콤하다 못해 위험하게 들렸습니다. 며칠 놀고 오자고 이 돈을 다 써버린다니, 너무 아깝지 않나요?
“됐어. 집에 가전제품 바꿀 거니까, 뭐가 좋을지나 생각해 봐.”
그러자 딸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엄마는. 집에 고장 난 것도 없고 다 멀쩡한데 뭘 바꾼다는 거야. 그게 과소비지.”
“과소비? 해외여행은 사치가 아니고?”
제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자, 딸은 별다른 말 없이 TV를 틀었습니다.
딸의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습니다. 요즘 애들은 정말 소비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저는 가전제품을 바꾸는 게 ‘가치 있는 소비’라고 여겼습니다. 집안일이 편리해지고 가족 모두가 혜택을 누리니까요. 그런데 딸에게는 그게 과소비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반대로 해외여행. 제게는 며칠 놀다 오는 사치일 뿐이지만, 딸은 새로운 경험, 견문 확장, 자기 계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딸은 가끔 명품 가방도 사고,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 돈을 저축하거나 실속 있는 물건에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이는 스스로 만족하고 가치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결국 문제는 ‘무엇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는 게 아닐까요?
흔히 우리는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면 가치소비, 불필요한 물건이나 여행은 과소비라고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일 뿐입니다.
오늘날 20~30대 청년들은 경험을 위해 기꺼이 돈을 씁니다. 여행은 물론, 스쿠버 다이빙,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취미 강습까지. 그들은 이런 경험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40~50대 부모 세대는 가정의 안정과 효율을 중시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가전제품, 가구, 부동산 같은 소비가 더 가치 있다고 느끼죠.
그런데 이 둘은 모두 옳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치소비와 과소비의 기준은 소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가치소비’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은 있습니다.
미래에 더 큰 이득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때 이득은 꼭 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건강, 배움, 관계, 자존감 등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냉장고를 하나 더 산다면?
넉넉한 저장 공간이 생기지만, 전기세와 식비가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오히려 더 많은 소비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가치소비라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해외여행은 어떨까요?
단순히 리조트에서 며칠 쉬다 오는 여행이라면 사라져 버리는 소비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그 경험이 자기 계발이나 커리어 확장으로 이어진다면 미래의 더 큰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등록?
꾸준히 한다면 병원비를 절약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대표적인 가치소비죠. 반대로 등록만 하고 안 가면 과소비가 됩니다.
명품 가방은 어떨까요?
그냥 허영으로 사면 사치입니다. 하지만 한정판이나 리셀 가치가 있는 제품을 알아보고 투자 개념으로 산다면 훌륭한 가치소비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명품은 주식보다 높은 수익률을 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같은 소비라도 ‘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치와 낭비가 갈립니다.
그렇다면 이 보너스는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요?
첫째, 서로의 관점을 존중해야 합니다.
엄마는 가전제품을 바꾸며 가족 전체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싶습니다.
딸은 여행을 통해 자기 세계를 넓히고 싶습니다.
둘 다 틀린 게 아닙니다. 단지 우선순위와 시선이 다를 뿐입니다.
둘째,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너스를 3 분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1. 전자렌지, 중소형 생활가전 교체 (실질적 편의)
2. 국내 여행 또는 경험 소비 (관계와 추억)
3. 저축·투자 (미래 대비)
이렇게 하면 각각의 소비금액은 조금 적어지더라도, 현재·경험·미래를 균형 있게 챙길 수 있습니다.
셋째, 소비 전 ‘질문’을 던지는 습관을 가지세요.
이 소비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단순한 욕구 충족인가, 아니면 내 삶을 더 나아지게 할 계기인가?
지금 당장뿐 아니라, 1년 뒤에도 “잘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소비가 아니라 가치소비일 가능성이 큽니다.
돈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나의 소비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꿀까?’를 따져보는 것입니다.
세탁기, 냉장고, TV를 바꾸는 건 집안일을 덜 힘들게 만들고 가족이 함께 쓰는 자산을 개선하는 선택입니다.
해외여행은 가족 간 추억을 쌓고, 새로운 시각을 얻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투자나 자기 계발은 미래의 안정과 성장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정답은 하나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엄마와 딸, 가족 모두가 서로의 시선을 이해하고 ‘서로 다른 가치소비’를 조율하는 것입니다.
한 번, 이렇게 따님에게 말을 건네보세요.
“엄마는 새 냉장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네 말도 일리가 있더라. 이번엔 우리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까?”
따님은 놀란 표정을 지을 겁니다. 이렇게 서로의 소비개념을 이해하게 됩니다.
돈는 어차피 한 번 쓰고 나면 사라지는 종이입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무엇을 남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물건일 수도, 경험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보너스를 현명하게 쓰는 비밀은 단 하나.
“우리 가족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소비의 기준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