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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헤어질 결심.

by 송대근
“이제 그만하자.”


툭 하고 떨어진 말이었다.

말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간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겁고 두려운 것인지.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미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나는 냉기 속에 맨몸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 말을 이미 수십 번은 들어 본 것처럼.


아니,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분했다.

뉘어가는 황혼빛에 방안은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커튼 아래로 스며든 오렌지빛이 점점 엷게 침침해졌고,

그녀는 그 위를 돌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녀가 맞는지, 내가 사랑했던 존재가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내 삶 속 어디든 스며들어버린 하나의 ‘현상’ 같았다.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익숙해졌던 태도, 목소리, 움직임.

이제는 그 익숙함이, 오히려 무서웠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힘을 주지 않은 팔로 그녀를 밀쳐냈다.

쓰레기통에 털어 넣듯 허무하게 쓰윽 밀려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만할 수 있겠어?’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

비웃지도 않았고, 위협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묻는 것처럼 평범한 말투였다.


하지만 나의 등골은 가차 없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언제 흔들리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는지,

언제 무너질지, 언제 돌아갈지.


그녀와 함께한 15년 동안,

나는 내 반응 패턴을 그대로 그녀에게 넘겨줬다.

어떤 감정이든 그녀는 한 번에 읽었고, 그 능숙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내가 완전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내 안쪽 깊숙이까지 손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 더는 견딜 수 없었다.


“... 그만할 수 있어.”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갈라졌다.

입술이 바짝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것조차 놓치지 않았다.


‘이것 봐. 아직도 나를 원하잖아.’


조용한 말로, 내 가슴을 정확히 겨눠 찔렀다.

조롱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그녀는 조롱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사실만을 말한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녀만큼 잘 아는 존재는 없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더 보고 있으면 다시 무너질 것 같았다.


“아니. 됐어.”


내 안에서 마지막 남은 용기를 겨우 끌어낸 힘이었다.

나는 그녀를 방 밖으로 밀쳐냈다.




그녀와 함께한 수년의 흔적들.

눅눅해진 메모장, 때 묻은 유리컵, 먹고 남은 과자봉지 까지도.

그 모든 것들을 한 무더기로 쓸어 담아 문밖으로 던졌다.


달그락, 달그락, 쿵.


바닥에서 울리는 소리 하나하나가

나의 과거가 무너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정리하다 말고 몇 번이나 손이 멈췄다.


이걸 버려도 되는 걸까?

나는 뭘 잃게 되는 걸까?

무엇을 얻게 되는 걸까?

정말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멈추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붙잡지는 않지만, 대신 기다린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어떤 핑계로든 다시 부를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더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내쫓고 방문을 굳게 잠근다.

이별은 용기가 아니라 습관을 끊는 일이다.


그녀가 없는 방. 방 안은 갑자기 넓어 보였다.

누군가가 오래 머물렀던 기척이 사라진 자리에는

묘하게 텅 빈 냄새가 흘러 다녔다.


나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녀와 함께 수없이 앉아있던 자리.

내가 가장 자주 무너지고, 가장 자주 체념하고, 가장 자주 합리화를 하던 자리.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감정이 지나간 뒤 남은 텅 빈 여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머리는 어디로도 내려앉지 못했다.

마치 모든 신경이 문 밖으로 향해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뒤척였을까.

시계는 보지 않았지만, 초침은 점점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방 안은 고요했다.

그런데 고요함이 고요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함에 눈을 떴다.


천장의 벽지에 어둠의 물결이 졌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제야 깨닫는다.


이별은 문을 닫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도,

그녀는 끊임없이 나를 불러낼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다.


공기 속에 아주 작은 불씨 같은 희미한 긴장감이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 귀를 간질이는 미세한 침묵.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문 너머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리고,

들리는 것 같았다.


‘내일 봐.’


매달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담담하게.

마치,



우리 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15년을 걸쳐온 이야기. 그 끝을 이 브런치북으로 풀어냅니다. 구독하시면 매주 일, 월요일 이 연애의 끝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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