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녀가 처음 한 말이자, 내가 가장 늦게 이해한 말.
스무 살의 봄,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의 감상은 질척한 축제 현장의 공기만큼 생생하다.
잔디 위엔 너덜 해진 신문지와 젖은 종이컵들이 널브러졌고, 막걸리 냄새는 밤공기와 섞여 달콤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여전히 흥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 혼란의 한가운데, 이상하리만치 안정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마치 그곳이 ‘자기 자리’인 사람처럼.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분위기.
그녀가 있는 자리엔 웃음이, 울음이, 싸움이, 화해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감정이 과장되고, 마음의 속도가 배로 빨라지는 공간.
나는 멀찍이서 그걸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저렇게 쉽게 사람 마음을 흔들지?”
모임이 끝날 즈음, 사람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하나둘 날아가 사라졌다.
그리고 조용해진 공간에서 그녀는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왔다.
‘안녕. 넌 여기 왜 온 거야?’
엉뚱한 질문이었다.
보통은 학과나 관심사를 묻는 게 정석인데, 그녀는 처음부터 핵심만 건드렸다.
허를 찔린 나는 적당한 답을 골라내지 못했다.
“어... 신입생이니까 온 거지 뭐.”
‘그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왜 왔냐니까.’
그녀의 말투는 직설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쾌했을 질문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사람처럼, 나의 속내를 자연스럽게 꺼내게 만들었다.
그날, 우리는 끝없이 이야기했다.
내 취향, 고민, 미래, 겁, 상처, 기대...
그녀는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너라면 그럴 거야.’
‘응, 그건 네 잘못 아니지.’
‘좋은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
그녀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듯했다.
오히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와 있으면 시간감각이 사라졌다.
밤 열두 시가 새벽 네 시가 되고,
새벽 네 시는 동이 트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게 그냥 ‘스무 살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강의실에서 눈이 감겼다.
숨이 턱 막히고, 혀끝이 바싹 말랐고, 머리가 한 박자씩 느리게 돌아갔다.
그녀와 함께한 밤들은 강렬했고, 그 잔상은 내 몸을 기름 없는 자동차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문제는 ‘감정을 너무 잘 어루만진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사람들의 감정이 부풀려지곤 했고,
어떨 때는 후회할 만한 말을 너무 쉽게 내뱉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그녀 때문에 눈물범벅이 되어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에게만큼은 무척 편안했다.
과하게 부추기지도, 차갑게 시비 걸지도 않는 절묘한 거리감.
입대를 한 달 앞둔 겨울밤.
밤새 어깨에 쌓여간 싸라기눈이 밤바람에 녹아가던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둘만 남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집착도 미련도 없어 보이던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입대하면 이제 나 못 만나겠네?’
그녀답지 않은 말.
순간, 등골을 적시는 한기가 스쳤다.
하지만 나는 겨울바람 때문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무슨 소리야. 휴가 나와서 만나면 되지.”
그녀는 날 보며 아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놀라울 만큼 천천히.
마치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래. 넌 다시 오겠지.’
그 말투가, 말의 속도가,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을...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섬뜩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이미,
그녀는 이미 내 일상이었고,
나만 아직 그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