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너 못 봐.”
그 말은 마치 연병장에서 외치던 경례 구호처럼, 내 안에서 단단하게 울렸다.
나의 선언에도 그녀는 빙그레
‘그래? 알겠어.’
라며 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전역 후, 내가 기어들어간 곳은 서울 동작구의 작은 섬.
재수생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던 고시촌이었다.
여기는 물러날 곳도, 그렇다고 피할 곳도 없는 고립지대였다.
내 방은 공장에 딸린 한 다락방이었다.
낮에는 공장이 바삐 돌아가고, 밤에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빈 공간에 라꾸라꾸 침대를 깔고 몇 시간 쪽잠을 청했다. 문을 열면 책상이 바로 닿았고, 창문을 열면 지나가는 지하철이 선로를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밤마다 벽 너머에서 들리는 옆 공장의 기계소리는 나를 괴롭혔다.
“좀만 버티면 돼. 군대도 견뎠는데 뭘.”
스스로 되뇌며 나는 매일 아침 5시에 눈을 뜨고 학원으로 향했다. 군대에서 만들어진 습관이 여기서도 굳건하게 발휘되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건 체력도, 머리도 아니라 루틴이었다. 루틴이 자리를 잡으면, 의지도 어느 정도 그 틀을 따라간다.
그녀를 떠난 첫 달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한 번씩 환청처럼 들리던 것 같은 그녀의 기억도 사라졌다.
‘어디야? 잠깐이면 돼.’
이런 목소리는 이제 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없는 밤은 허전했지만, 공허를 느낄 틈은 없었다. 문제집을 풀다가 눈이 스르륵 감기기 전까지 시간을 태웠다. 전역 직후 나는 언제나 그녀와 함께 시간을 뒤틀어 보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마치 빚을 갚아나가는 시간 같았다.
무언가 정말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하나씩, 하나씩.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망쳐놓은 마음을 청산하는 기간.
그렇게 4개월이 지나갔다.
9월, 성적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목표 대학의 예상 커트라인은 여러 번 넘겼고, 그 이상도 가능했다. 학원 선생님도 “이제 페이스만 유지하면 된다”라고 했다.
문제는 그 말이었다.
유지.
“그럼... 이제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그 순간, 그녀가 머릿속의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뒤, 나는 결국 그녀를 다시 만났다.
“잠깐이야, 잠깐.”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그녀와 약속을 잡았다.
잠깐의 해방을 약속하는 그곳, 익숙한 오렌지색 조명 아래.
손에 닿는 순간, 그녀는 속삭였다.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지?’
그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하고, 치명적이었다.
그날부터 내 생활은 무너지고 새롭게 세워졌다.
그녀에게는 답답한 수험생활 속 힘듦을 숨김없이 토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는 내 감정을 모두 소화해 줬다.
그녀는, 그녀는...
어쩌면, 현실을 마비시킨 걸 지도.
그녀를 만난 다음 날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아침 출석을 지각하기 직전에 도착하거나, 문제를 푸는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당장은 성적이 유지되니, 나는 합리화를 거듭했다.
“어차피 체력도 좋고, 머리도 굳지 않았고...”
자신을 속이는 데 천재적이었다. 특히 욕망과 타협할 때는 더더욱.
그리고 어느 늦은 밤, 나는 또다시 그녀를 찾았다.
학원 앞에서 멀지 않은 포장마차였다. 주황색 천막 아래에서 나는 그녀는 내 귓가에 바람처럼 속삭였다.
‘오늘은 좀 많이 보고 싶었어.’
그녀를 마주친 순간,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늘 이런 방식으로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집에도 없던 나의 자리.
사회에도 없던 나의 자리.
하지만 그녀 옆이라는 자리는, 나에게 온전히 자리매김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지하철이 끊겼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세 시간.
그날 나는 서울의 밤을 걸었다.
철길 아래로 내려가자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청소차는 길바닥의 먼지를 쓸어가며 물살을 튀기고 지나갔다.
신발은 축축이 젖었고, 바람에 휘날린 머리칼이 이렇게나 헝클어졌나 싶었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내 머릿속엔 여전히 잔상이 울리고 있었다.
‘좀 더 같이 있자. 아직 밤은 길잖아.’
나는 이를 악물고 걸었다. 그녀의 그림자를 떨쳐내듯, 발을 세게 내디뎠다.
새벽 5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다시 학원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돼버린 것이다.
새벽녘 직전의 어둠만이 나를 맞았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이상한 패배감과 승리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은 패배였고, 집까지 걸어온 것은 승리였다.
하지만 사실을 깨닫기까지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가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11월, 수능이 끝났다.
성적은 예상대로였고, 목표하던 대학도 합격권 안에 있었다.
‘축하해! 이제 자유롭겠네?’
수능이 끝난 날,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미래가 아닌 그녀였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에, 그녀와의 시간을 더 많이 쌓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집에서도 눈치를 주었지만, 수험생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분 아래 어느 정도 넘어가 주었다. 그 느슨함이 나를 더 깊이 그녀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구속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일탈이 아니었다.
내 일상, 내 밤, 내 고통과 위로를 모조리 장악한 존재였다.
그날, 나는 가장 어두운 방에서 나왔지만,
그녀라는 새로운 방에 발을 들여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