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버리면, 많은 걸 얻을 수 있어.’
노량진을 벗어난 뒤 내가 도착한 곳은 부산 영도, 바다와 사이에 걸린 작은 섬 위의 학교였다.
선원을 양성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제복을 입은 대학. 해양대.
학교는 늘 해풍에 절은 금속 냄새가 복도마다 스며있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창문틈이 끼익 거리며 몸부림쳤다.
생활은 대학생이라기보단 사관생도에 가까웠다.
기상나팔, 구보, 집합, 점호.
억압된 군대생활, 억압된 재수생활, 억압된 대학생활.
나는 억압의 우물을 파고 있는 중이었다.
기숙사 벽엔 먼바다를 표류하는 곰팡이가 페인트가 벗겨진 틈을 비집고, 오래된 창문엔 누군가의 한숨 같은 습기 자국이 희미하게 번졌다. 아침엔 구보로 다져진 폐포에서 피맛이 올라왔고, 저녁엔 조교 손전등의 어스름한 빛이 복도 틈새를 긁으며 돌아다녔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일탈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허락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오면서도 그녀에게 이별을 말하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별을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떠나고 싶은 건 군대도, 노량진도, 과거도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여기까지 왔으면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그렇게 믿으려 했지만- 그 믿음은 너무도 가벼웠다.
입교 후 처음 마주하게 된 주말, 나는 영도대교를 건너 남포역으로 무작정 걸었다. 갈 곳도 없었고, 갈 이유도 없었다. 그냥 반복되는 규율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비린내를 머금은 소금물은 흑구 두를 뚫고, 생선 비늘이 바람에 튀기던 자갈치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우연히,
아니, 필연히-
그녀를 다시 보았다.
‘한참은 못 봤네. 잘 지냈어?’
그녀는 마치 이곳이 고향이라는 듯, 울퉁불퉁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여기 있냐고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 오면 그녀를 마주칠 것 같은 직감. 그 직감을 따라온 걸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틈틈이 내 일정에 스며들었다.
주말이 사흘이 되고, 사흘이 이틀이 되고, 결국 매일이 되었다.
아침의 구보때면 그녀의 잔향이 떠올랐고, 오후엔 강의실에서 그녀의 목소리처럼 맴도는 울렁거림이 가슴과 위장을 눌렀다.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결국, 나는 또다시 그녀를 찾았다.
기숙사에 그녀를 몰래 들이는 일도 있었다.
규율상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
발각된다면 정학, 아니, 퇴학까지도 가능했다.
경비의 손전등 불빛이 방문 아래 틈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숨이 멎을 정도로 떨렸다.
그런데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차라리 걸리기를 바랐다.
들켜버리고, 강제로 끊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 두려움과 기대 사이에서,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그녀를 더 깊은 곳으로 받아들였다.
이 위험하고 금지된 시간이 내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생활은 서서히 무너졌다.
동아리에서 빠지는 날이 늘었고, 실습현장에서도 지적받았다.
동기들은 “요즘 너 왜 이렇게 흐트러졌냐”라고 물었지만, 나는 그들의 말소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로 향하는 대신, 끊임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평온한 그곳.
마치 그곳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항상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 주변 소리들은 희미해졌다.
아무것도 신경 쓸 것이 없었다.
나는 숨이 가빠졌고, 온몸은 뜨거워졌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공허함이 혀끝을 훑었다.
한 번 맛본 달콤함은 도파민의 열차의 연료가 되기에 충분했다.
악순환이 아닌, 자발적 순환.
그렇게 그녀는 내 밤을, 내 청춘을, 내 생명을 잠식했다.
그렇게 4년.
아무도 모르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고해성사를 하지 못한 죄가 시간 속에서 문들어져 가는 느낌.
졸업식 날, 학사모를 던지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그녀는 곁에 있었다.
그녀를 떼어내지 못한 채 졸업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 채.
아니, 부끄럽다는 감정조차 무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제 완벽히 구속돼 있었다.
스스로 원했듯.
그녀는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핏줄 속에 있다.
이제 그녀와 함께, 누구도 만질 수 없는 감옥으로 출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