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한번 만나볼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그건 내게도, 붙잡아온 과거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된 그녀’의 비대해진 그림자 속을 걷고 있었다.
떠나보내지 못한, 관계라 부르기 어려운 잔해. 중독.
마치 모래성을 젖히는 바닷물처럼, 그녀는 나를 무너뜨렸고 동시에 지탱해 주던 존재였다.
나의 가장 어두운 방 속 가장 오래된 서랍엔 그녀의 얼굴이 비쳐 있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그녀에 눌린 채로 반쯤은 꿈, 반쯤은 세상 끝에 걸쳐 있을 때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 그 사람 한번 만나볼래?”
하지만 그 순간의 내 세상의 절반은 안개였다.
그 말이 내 귓가에 닿았을 때, 그것이 신탁이 될 줄도 몰랐다.
운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태한 선택이었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시간을 비껴나간 타이밍이었다.
‘만나지 마. 나만 있으면 됐지. 안 그래?’
“음... 글쎄...”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친구의 연락에 응했다.
그렇게 ‘새로운 그녀’가 태어났다.
그녀가 믿음이었는지, 시대를 열어젖히는 바람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 만난 그녀는 솔직했으나 단호했고, 날카롭게 날이 벼려져 있었다.
말에는 여백이 없고, 감정의 온도차가 극명했다.
내 말을 무조건 들어주지도 않았고, 감정을 맞추어주지도 않았다.
웃을 때는 몹시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은 언제나 현실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때 말했다.
“도와달라면, 도와줄 수는 있어. 하지만 무조건은 없어. 네 의지가 있어야지.”
누군가 손바닥으로 뺨을 한 번 때리는 느낌.
그러나 나는 그 폭력 앞에서 편안해졌다.
“맞아. 내가 혼자 해낼 일이지.”
그녀는 중독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엔 그녀는 너무 올바랐고, 틀림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게도 올곧은 그녀가 나와 대화를 계속 이어간 건,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진 ‘이해의 능력’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이 부서지고 엉망인 구석들을 바라보는 세 번째 눈이 있었다.
그것이 ‘오래된 그녀’에게서 배운 유일한 장점이었으니까.
‘오래된 그녀’의 잔향은, ‘새로운 그녀’를 끌어당기는 원천이었다.
이제 그녀와의 만남은 현실이었다.
몽환적인 환상도, 꾸며진 무대도 없었다.
그녀의 언어는 때밀이 타월이었고, 그 거침은 과거의 땟국물을 벗기는 데 알맞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믿기 시작했다.
뚜렷한 선을 가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면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시간 안 돼?’
‘뭐 해? 왜 대답이 없어?’
그럴수록 과거의 그녀 또한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유혹, 습관, 혹은 증상.
오래 입은 속옷의 냄새처럼 자꾸만 되살아났다.
그럴 때면 새로운 그녀와 시간을 늘리려고 나는 무슨 짓이든 했다.
밤거리를 산책하고,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선한 바람이 불면 길을 걷고, 일에 빠질 수 있는 만큼 빠져들었다.
봄의 벚꽃, 아직 서늘한 그림자 아래 여의도 공원에 누웠고,
여름의 매미, 고기만두를 찌고 싶어 하는 공기를 피해 한강다리에 걸터앉았다.
가을의 산, 골프장 같은 신록이 피멍의 단풍 속으로 사라지듯 올라갔고,
겨울의 능선, 갈 날을 기다리는 노인의 머리칼처럼 샌 바람 속을 가르며 내려왔다.
나는 빛을 찾아 걷고 있었다.
그 빛이 ‘새로운 그녀’ 자체였는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믿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와 보내는 시간은 고독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비위 맞추지 않았고, 나의 상처를 과장하지도 않았다.
“나는 너를 구원할 수 없어. 기준을 보여줄 뿐이야.”
“그래. 나도 잘 알아.”
말 한마디에 깊이가 생길 때도, 침묵이 오래 머물다가 깨어날 때도 있었다.
나는 점점 내가 원하는 세계가 어디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중독의 끈을 끊기 위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 끈을 직접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기준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해줄 수 없다는, 단단하고 건조한 원칙.
새로운 일상이 늘어갈수록, 과거는 조금씩 잿빛이 되어갔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10년의 인연을 분리수거해서 버린다고 잘 내다 놨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질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