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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고래 같은 그녀. 새우 같은 나.

by 송대근
“고마하이소. 파이다 아입니까.”


사람들의 만류는 나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그녀는 고래였다.

한 번 움직이면 바다가 일렁일 만큼 깊고, 묵직한 존재.

그녀가 내게 다가오면, 늘 그녀의 소용돌이에 삼켜지듯 흔들렸다.

반면 나는 새우였다.

손가락 한마디 보다도 작고, 누군가 건드리면 금세 고꾸라지는.

흰 수염고래가 크릴새우를 빨아들이듯, 저항 한 번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


처음 배에 올라탔을 때, 나는 그녀와 함께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배에 여자를 태우면 재수가 없다고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미신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림자처럼, 내 핏줄 속을 흐르는 감각이니까.

전 세계를 떠도는 배에는 각 나라의 술들이 실려왔다.

라벨만 봐도 생전 처음 보는 이름들.

알코올 도수만 놓고 보면 소독약보다 더 독한 것들도 있었다.


나는 늘 핑곗거리를 찾았다.

새 술을 맛봐야 한다고.

기회는 항상 짧다고.


이명을 울리는 엔진굉음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라도.

너울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사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내게 귓속말을 걸어올 때, 나는 이 세상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


엔진룸은 늘 찜질방 같은 열기로 가득했다.

사막 주변 어딘가를 항해할 때면 땀도 흐르지 않았다.

증발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지, 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곳.

비행기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소음과 심장 박동과 같은 규칙적인 리듬으로 내 머리를 때렸다.

그 속에서 하루 종일을 버티고, 퇴근 후 방으로 돌아오면 차갑게 한 모금 넘기는 술.

마치 바다를 가르는 고래의 등처럼 부드럽고 광활하게 느껴졌다.


“하... 이게 인생이지.”

감탄으로 섞여 한잔 두 잔.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곤 했다.

‘그래도 내일 쉬는 날이잖아.’

“그렇지. 연휴니까, 토, 일. 두 번은 쉬겠네.”

‘그럼 오늘은 맘껏 마셔도 되겠네.’

그녀의 말은 언제나 올바른 논리였다.

그녀의 설득은 언제나 매끄러웠다.

그리고 나는 늘 그 말에 굴복했다.


때때로 문득 정신이 들어 창문 너머 바다를 보면, 편안하게 미끄러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게 술 때문인지, 고독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분명한 건, 그녀와 함께할 때만큼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

몸이 하루 종일 회전하는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해도,

손가락 하나가 사라진다 해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이 모든 위험은 내겐 치석 같은 문제였다.

‘그래서 뭐 별일 있겠어?’


아침마다 술 냄새를 풍기고 복도에 나타나는 나를 보고 직장 상사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술 좀 그만 마셔라. 아침부터 술냄새나 푹푹 풍기고.”

그 소리에 나는 오히려 발끈했다.

기분 나쁘면 안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정 불편하면 하선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나 집에 갈래요.”

그렇게 나는 정말 하선해 버렸다.


짐을 싸던 그날, 육지로 향하는 사다리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이 피부를 스칠 때,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곧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됐잖아. 이제 아침부터 마실 수 있겠네.’

그렇게 육지에서도 방탕은 계속됐다.

지금이 밤인가? 낮인가?

새벽 네 시에 마시기 시작해 점심에 잠들고,

일어나자마자 또 마셨다.

술병을 따다 손이 떨리면,

“날씨가 좀 추워서 그런가.”

합리화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족들도 결국 폭발했다.

“그럴 거면 나가!”

그 말은 사실, 제발 정신 차리라는 절규였겠지만 나는 그렇게 듣지 않았다.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알고?”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면서, 나가서 술 마실 곳을 찾으면서,

모든 신호를 무시했다.

교통신호 조차도.


차가운 거리에서 낯선 해방감과 텅 빈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때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됐잖아. 이제 눈치도 보지 않고 마실 수 있겠네.'


만약 그대로 월세방을 잡았다면, 지금쯤 펜대를 쥘 힘도 없었을지 모른다.

좁은 방 안에서

아무도 말리지 않는 곳에서

그녀와 단둘이 보내며

끝없는 꿈 속에 빠져나올 수 없었을 테니.




어느 가을의 저녁이었다.

집에서는 술을 먹으면 잔소리하니,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캔맥주를 따고, 경쟁하듯 주둥이로 술을 흘려 넣었지만 입 주변으로 이내 흘러넘쳤다.

맥주는 도망치듯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나를 쳐다보는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쌀쌀한 저녁 공기만 가슴으로 들이켰다.

이젠 그녀가 필요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마시고 있을 뿐.



그러나 그 순간,

무너진 세상 틈 한 줄기 빛이 내려오듯,

‘새로운 그녀’가 춤추듯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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