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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헤어질 결심(完).

by 송대근
이 글은 에필로그입니다.
이야기 내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글을 처음부터 읽으신 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서른다섯, 헤어질 결심>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스무 살 무렵부터 술을 배우기 시작해 서른이 되어 완전한 중독에 빠졌던 10년, 그리고 그 늪에서 기어 나와 다시 온전한 ‘나’를 되찾기까지 치열했던 5년의 기록입니다. 총 15년에 걸친 제 삶의 그림자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처음의 술은 즐거움이었습니다. 특히 술에 관대한 우리 사회에서 중독은 ‘애주가’라는 이름 뒤에 쉽게 숨을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을 술에 젖어 살다 보니, 신체가 먼저 비명을 질렀습니다. 간 수치가 오르고 비만, 고지혈증 같은 성인병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건 몸이 아니라 뇌가 망가지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성격은 괴팍해졌고, 감정의 파도는 둑을 넘듯 수시로 요동쳤습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가면은 근근이 유지했지만, 가면을 벗은 가정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그 균열은 직장까지 번져나갔습니다. 마시고 싶지 않은데 잔을 들고 있는 손, 왜 마시는지도 모른 채 취해있는 정신. 그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술을 끊어야겠다고.


하지만 중독의 굴레는 ‘결심’만으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금주를 시도하고 1년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는 금주’였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한계가 명확합니다.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뜨거운 갈망이 불씨처럼 남아있었으니까요.


술을 안 마시는 것과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행위로서 술을 끊었더라도, 마음속에 갈망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중독 상태입니다. 언제든 다시 폭음을 하고 과거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휴화산과 같습니다. 주변에서는 “1년이나 끊었으니 이제 조절할 수 있겠네, 한 잔쯤 어때?”라고 권합니다. 그 달콤한 합리화에 넘어가 입을 대는 순간, 저는 다시 과거의 폭음하던 괴물로 돌아갔습니다.


그 수많은 실패 끝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금주의 영역을 넘어 ‘탈(脫)중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요. 그것은 배고픔을 참는 것보다 아득히 어려운, 본능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그 지난한 싸움 끝에 결국 ‘무시’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금주(禁酒)는 성을 쌓는 일과 같습니다.

하루하루 술을 마시지 않은 날들을 벽돌처럼 쌓아 올립니다. 성이 높아질수록 뿌듯하지만, 동시에 불안합니다. 벽돌 하나만 잘못 빼내도, 단 한 번의 실수만 있어도 성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성을 보며 느끼는 자괴감은 우리를 다시 술로 이끕니다.


그러나 탈중독(脫中毒)은 깨끗한 수조를 관리하는 일과 같습니다.

맑은 물이 찰랑이는 수조. 그곳에 오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고 해서 당장 수조가 썩지는 않습니다.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자는 압니다. 그 작은 오물이 미생물을 번식시키고 결국 수조 전체를 병들게 할 것임을요. 그래서 애초에 오물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맑은 상태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소중하기에 더러운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이 제가 도달한, 그리고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탈중독’의 상태입니다.


이 이야기를 쓰며 ‘연애 서사’라는 형식을 빌렸습니다. 혹여 로맨스 소설을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그리고 중반까지의 혼란을 즐겨주신 분들께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굳이 이런 장치를 쓴 이유는, 제가 느낀 중독과의 헤어짐이 마치 지독하게 사랑했지만 끝내 헤어져야만 하는 옛 연인과의 관계와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중독)는 달콤했고, 나를 위로했고, 끝내 나를 파괴했습니다. 그녀를 끊어내는 과정은 사랑과 증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권태와 이별의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제 금주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참으며 날짜를 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술을 마시지도 않습니다. 이제 제 삶에서 술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며, 인식조차 하지 않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술을 포함한 수많은 중독의 굴레 속에서, 헤어질 결심을 망설이고 있는 분들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듯, 당신의 삶에서 중독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처음부터 작품을 읽어 주신 독자분들은, 어느순간 '그녀' 가 "중독" 으로 바뀐 시점이 대해 혼란이 오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작품내 의도한 트릭입니다. 연애소설로 보이듯이 중독이 서서히 찾아오게 되는 공포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작품 내 중독은 저에게 ‘작은따옴표’ 분홍색 글씨로만 말을 걸어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이것을 실제 여성이 말을 거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은따옴표’ 는 애초에 그녀가 실재하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 즉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제한적인 표현에 대한 트릭입니다. 작품 내에서 그녀는 저 외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5화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그녀' 의 모델은 제 아내로, “큰따옴표”를 이용해서 저에게 말을 겁니다.

실재인물들과의 대화는 “큰따옴표” 를 통해서만 진행되었으므로, 다시금 작품을 처음부터 읽어나가시다 보면 제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중독의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해석하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마지막화에서 등장한 영도는 저의 모교인 해양대학교의 실제 위치이며, 이 때 사용된 절영도 설화 역시 실화임을 밝힙니다.


- 작가 송대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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