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국민음식, Pho의 탄생 스토리
사이공의 거리는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그의 소설 '연인'에서 남긴 이 한 문장은, 베트남의 복잡다단한 역사와 문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향기 속에는 천 년에 걸친 중국의 영향과, 60여 년간의 프랑스 식민 지배가 남긴 독특한 맛의 조화가 숨어 있습니다.
골목 어귀에서 풍기는 쌀국수의 향, 바게트와 어우러진 고소한 고기 향, 그리고 커피 향이 뒤섞인 베트남의 거리.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음식 문화가 아닌,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올리다 문득 생각합니다. 이 친숙하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 중국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곳은 베트남입니다. 현재의 베트남 북부는 기원전 111년부터 기원후 939년까지 약 천년 이상 중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 긴 세월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베트남 문화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베트남어 어휘 중 65-70퍼센트가 한자에 기원을 둔 한월어라는 사실은 그 영향력의 깊이를 실감케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베트남이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모든 식사에서 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베트남의 식문화가 얼마나 깊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각각의 특색 있는 식기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는 숟가락과 포크를 주로 사용하며,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영향으로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하되 때로는 손으로 직접 먹기도 합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상황에 따라 젓가락, 숟가락, 손을 모두 사용하는 등 다양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베트남의 젓가락 문화는 특히 독특하게 돋보입니다. 이러한 베트남의 젓가락 문화가 일본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매우 흥미롭습니다.
10세기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베트남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유지했습니다. 이는 식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베트남은 단순히 중국 문화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변용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쌀국수인 '퍼(Pho)'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중국의 육수 문화에 영감을 받았지만,
베트남 고유의 향신료와 조리법을 더해
완전히 새로운 음식을 탄생시켰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베트남의 음식 문화는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합니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새로운 재료와 조리법이 도입되었고, 이는 베트남 요리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빵인 바게트가 베트남에 전해져 20세기 초에는 현지의 식재료를 넣어 만든 '반미'라는 독특한 샌드위치가 탄생했습니다. 이는 동서양 문화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식민 시대부터 베트남 커피 문화는 프랑스에서 유래한 우유와 커피를 함께 즐기는 방식을 깊이 받아들이며 발전해 왔습니다. 특히 연유를 넣어 마시는 '카페 쓰어(cà phê sữa)'는 이 시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커피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이 땅에 우유와 커피 문화를 들여왔지만, 결국 현지에서는 연유를 더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1880년대 말 사이공의 거리에서는 여성들이 커피를 판매하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음료 소비를 넘어 사회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와 자립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고, 커피숍은 개인적 교류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이슈를 논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처럼 커피 문화는 베트남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며 발전해갔습니다.
또한, 프랑스 시대부터 형성된 대규모 커피 농장 체계는 오늘날 베트남을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으로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특히 로부스타 품종의 성과는 베트남 커피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였으며, 현재도 국제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베트남의 커피 산업은 단순한 농업을 넘어 국가 경제와 사회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며 성장해왔습니다.
커피는 베트남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고,
오늘날 세계적인 커피 생산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커피는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과 정체성을 대표하는
소중한 자부심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국민 음식인 퍼(Phở).
하지만 의외로 긴 역사를 가진 음식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퍼는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등장했고,
북부 하노이에서 시작해 점차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과거 베트남은 농업 중심 사회였고, 소는 노동력을 담당하는 중요한 가축이었죠. 도축보다는 경작에 필요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쇠고기를 먹는 문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후, 프랑스의 식민 통치와 함께 변화의 시점이 찾아옵니다. 프랑스인들은 쇠고기를 주요 식재료로 사용했고, 하노이에는 이를 위해 도축장이 생겼습니다. 프랑스인들이 소비하고 남긴 뼈와 부속고기—힘줄, 기름기 많은 살점—는 현지 시장으로 유입되었고, 이 재료들이 기존 베트남 쌀국수와 만나 새로운 국물 요리로 발전하게 됩니다. 또 하나, 당시 하노이에는 광둥계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국수 가게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쇠고기 쌀국수(ngưu nhục phấn)’라는 이름으로 광둥식 호펀(ho fun) 스타일의 면 요리를 판매했습니다.
이처럼 퍼는 프랑스의 ‘pot-au-feu(쇠고기 수프)’와 중국 광둥식 쌀국수, 그리고 베트남 현지 재료와 조리법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요리입니다. 식민지의 충돌과 문화의 혼종이 한 그릇 속에 녹아 있는, 전형적인 문화 융합의 산물인 셈입니다.
초기 퍼는 간단한 삶은 쇠고기와 면을 얹은 국수국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1939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쇠고기 판매를 제한하면서 또 다시 변화가 찾아옵니다. 닭고기를 넣은 ‘퍼 가(Phở gà)’가 확산되었고, 퍼는 점차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발전하며 더 많은 사람이 즐기게 되었습니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은 북과 남으로 나뉘었고, 북부를 떠난 약 200만 명이 남쪽으로 이동하며 퍼도 변화의 물줄기를 탔습니다. 남부에서는 더 달고 풍성한 맛과 허브, 숙주, 라임 등 다양한 곁들이 더해졌으며, 이로써 북부 스타일과는 구별되는 ‘남부식 퍼’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퍼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베트남인들은 퍼를 통해 고향의 기억과 정체성을 이어갔고, 퍼는 그들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퍼는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pho’라는 이름으로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건강식 트렌드와 맞물리며 대표적인 동양식 누들 수프로 자리 잡았습니다.
퍼와 함께 베트남을 대표하는 또 다른 국수가 바로 ‘분(Bún)’입니다.
분은 퍼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지닌 압출식 쌀면으로,
1800년대 후반 기록에도 등장하는 역사 깊은 음식입니다.
퍼가 넓고 납작한 면을 썰어 만드는 반면, 분은 발효된 쌀 반죽을 통에 넣고 구멍을 통해 눌러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늘고 원통형 면은 찬 육수와 함께 차갑게 먹거나, 비빔, 또는 구운 고기와 조합해 즐깁니다. 다양한 방식의 즐김이 가능한 것도 분만의 매력입니다.
지역마다 독특한 분 요리들이 발달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분 보 후에(Bún bò Huế)’는 중부 후에 지방의 유명한 매운 쇠고기 쌀국수로, 강한 향신료와 깊은 국물이 특징입니다. 또 다른 대표는 하노이의 ‘분짜(Bún chả)’입니다. ‘짜’는 ‘완자’라는 뜻으로, 양념한 다진 돼지고기를 동그랗게 빚어 숯불에 구워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짜’는 쌀국수와 숯불 불고기의 만남으로, 구운 고기, 새콤한 느억맘 소스, 생채소, 허브가 함께 제공되며, 먹는 방식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어 더욱 매력적입니다.
‘짜’라는 단어는 베트남 음식명에 자주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짜쭈어(chả giò)’는 튀긴 스프링롤을, ‘짜라롯(chả lá lốt)’은 라롯 잎에 싸서 만든 완자를 의미합니다. ‘짜’는 단순히 고기 요리를 넘어, 베트남식 조리법과 문화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고기를 다지고 구워내는 이 문화적 메시지는 베트남 음식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코드입니다.
퍼는 단순한 한 그릇의 국수가 아닙니다. 식민지의 흔적, 전쟁의 상처, 이민자의 정체성, 그리고 글로벌화의 흐름이 모두 녹아든 문화의 그릇. 그 속에는 베트남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 조용히 자리잡아 있습니다. 이렇듯 퍼가 역사적 계기의 음식이라면, 분은 오랜 일상과 감각의 축적입니다. 두 국수는 면의 모양만큼이나 다른 방식으로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이범준
미식문화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