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 스팸, 그리고 건빵 속에 숨겨진 이야기
큰 혁신이 일어나는 순간은 대개 불안과 두려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해결책의 발견에 미래가 달려있다는 절박함을 느끼는 상황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절박해져야 거대하고 신속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는 말 탄 기병이 전쟁에 투입되었으나, 1945년 종전 시에는 핵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동기가 작동했기에 단기간 내에 이러한 혁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쟁은 당장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늑장과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며,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모든 역량을 동원해 즉시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한 절박함은 전쟁 중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에게도 예외 없이 존재했습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독일이 적성국 관계가 되면서, 미국 본사의 코카콜라 원액(Merchandise 7X) 수출이 독일로 전면 차단되었습니다. 독일은 전시 통제경제 체제 하에 있었고, 해외 수입은 금지되었으며 원료 배급과 공장 가동 압박이 가중되었습니다. 강력한 점유율을 유지하던 코카콜라 독일 지사(Coca-Cola GmbH)는 핵심 원료가 끊기면서 기존 제품을 생산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지사장이었던 막스 키스(Max Keith)는 회사 생존을 위해 전시에도 판매할 수 있는 탄산음료를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장에서 개발된 이 음료는 사과즙 제조 후 남은 사과박, 유청(whey), 보리당, 비트당 등 당시 확보 가능한 잔여 농산 자원을 활용해 탄산과 향료를 첨가한 황갈색의 탄산음료였습니다. 오렌지 주스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으며, 현재 우리가 아는 환타와는 맛도 성분도 전혀 달랐습니다.
직원들이 제품 이름을 공모하던 중, 막스 키스가 "상상력을 발휘해봐(Fantasie)!"라고 말하자, 한 직원이 즉석에서 "Fanta!"라고 제안했고, 그 이름이 정식 상표로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환타는 단순한 신제품이 아니었다.
전시 체제 속에서 수입이 차단되고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
외국 기업의 현지 자회사가 생산 설비와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전시용 대체 음료’였다.
이는 코카콜라라는 상징적 미국 브랜드의 독일 내 생존 방식이었고, 동시에 독일 사회 안에서는 자국 생산 체계에 기반한 국산 음료처럼 소비되었습니다. 환타는 나치 독일의 국민 음료로 널리 판매되었고, 코카콜라 본사와의 연결은 공식적으로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전쟁 이후 환타는 코카콜라 본사에 의해 정식 브랜드로 편입되었고, 1950년대부터는 오렌지향 탄산음료로 레시피가 완전히 리뉴얼되었습니다. 전후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재출시된 환타는 과일맛 탄산음료로 세계 각국에 퍼졌으며, 21세기 현재까지 180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환타는 그저 흔한 탄산음료가 아닙니다. 그 기원은 자원이 차단된 전시 상황에서 태어난 '결핍의 산물'이며, 기업이 생존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시에도 마셔야 했던 사람들과, 팔아야 했던 기업의 합작품이었습니다. 환타는 전쟁이 식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식품사적 사례입니다.
스팸(SPAM)은 1937년 미국 식품회사 호멜(Hormel Foods)에서 개발된 통조림 햄입니다. 돼지고기 어깨살과 햄, 소금, 물, 감자 전분, 설탕, 질산나트륨 등을 혼합해 만든 이 식품은, 냉장 보관 없이도 장기 저장이 가능하고 조리가 간편하다는 특성 덕분에 대량 소비 시대에 적합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병사들은 스팸을 주된 단백질원으로 섭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름을 총기 윤활제나 부츠 방수제 등 비식용 용도로도 활용했습니다. 이는 스팸이 단순한 전투식량을 넘어, 총기와 피복, 연료와 함께 전장을 지탱하는 전면 물자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군수 보급체계 내에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스팸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었다.
미국 정부는 호멜사로부터 약 6만 8천 톤에 달하는 스팸을 미군에 공급했다.
한국전쟁(1950~1953)에서도 스팸은 미군의 주요 전투식량으로 활용되었으며, 전쟁 이후 식량난에 시달리던 한국 사회에서 귀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스팸과 소시지, 통조림 햄 등을 활용해 만들어진 부대찌개는 이후 한국의 대중음식으로 정착했고, 전쟁의 흔적이 오늘날 식탁 위 문화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스팸 소비국입니다. 스팸은 한국에서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명절 선물세트, 식탁 위 고급 가공육, 또는 '미군 부대와 생존의 기억'이 응축된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편 스팸은 한국뿐 아니라 하와이(스팸 무수비), 일본(스팸 오니기리), 대만·홍콩 등지의 볶음요리 등 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현지화된 형태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 퍼진 이 음식은, 각 지역의 문화적 조건과 만나 재해석된 현대의 글로벌 식품으로 진화한 셈입니다.
스팸의 역사는 단순한 통조림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전쟁과 산업, 식량과 문화의 교차지점에서 태어난 20세기적 아이콘이다.
스팸이 전쟁 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군인들의 탄수화물을 해결한 것은 건빵이었습니다. 건빵의 원형은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저장용 빵, 즉 '건조빵' 형태로, 기원전 수천 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이 빵은 밀가루와 물을 반죽해 구운 뒤 햇볕이나 화덕에서 말려 장기 보관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으로, 유목민, 군대, 상인들의 이동에 필수적인 식량이었습니다.
건빵은 고대부터 전쟁과 긴 여정에서 중요한 식량으로 사용되어 왔다.
고대 로마에서도 병사들을 위한 전투식량으로 건조빵이 사용되었습니다. 라틴어로는 buccellatum이라 불렸는데, 이는 가루 반죽을 말린 뒤 단단하게 구운 빵으로, 군단병들이 행군 중 물이나 와인에 적셔 먹던 전형적인 전투식량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정복 활동에서 이런 저장형 곡물식은 군의 생존과 작전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 십자군 전쟁 시기, 유럽 병사들은 장기간 원정을 위한 식량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중동 지역에서 사용되던 건조빵 기술이 유럽 병참 시스템에 수용되었고, 특히 이슬람권에서 쓰이던 저장식 기술과 재료 구성은 십자군에 의해 지중해 전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해군 등에서 선상식량과 전투식량의 표준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건조빵을 '비스킷' 또는 '하드택(hardtack)'이라고 부르며, 바다를 건너는 선원들과 대륙을 건너는 군인들에게 꼭 필요한 군량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미국 남북전쟁, 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비스킷형 전투식량은 세계 각국 군수체계의 핵심이었다.
1801년 미국에 소개된 건빵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전투식량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건빵은 일본과 한국에도 전해졌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군제와 함께 건빵을 전투식량으로 도입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이 제공한 C-레이션과 함께 활용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건국 이후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활용해 건빵을 생산하여 군에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한국형 전투식량(K-레이션)이 개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건빵은 한국군의 전투식량 구성품으로 포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건빵은 단순한 과자가 아니라, 고대 중동의 생존식 문화, 십자군의 전쟁 경험, 유럽 근대군의 병참체계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전쟁과 보존식의 역사가 응축된 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건빵은 비상식량이나 간식으로 널리 소비되고 있으며, 그 역사와 기능성 덕분에 단순한 음식 그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위기와 비극의 한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그 과정에도 존재하는 밝은 면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했고,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전시에도 새로운 음식이 탄생했고, 역경 속에서 먹던 음식은 이후 우리의 식탁 위에서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음식들의 뒷 이야기가 흥미로우셨나요? 이제 모건 하우절이 불변의 법칙에서 언급한 문구로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좋은 것들을 낳은 토대이며,
현재의 고통은 미래에 누릴 것들을 위한 기회의 씨앗이다.
출처: [현충일 특집] 전쟁이 만들어낸 맛?...포화 속 피어난 음식 이야기[이범준 제주한라대 교수]
이범준 교수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