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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수화물은 죄가 없다.

탄수화물에게 씌여진 억울한 누명

by 송지

탄수화물의 역사: 생명의 원천에서 비만의 주범까지

한 시대의 '생명의 원천'이 다른 시대에는 '비만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같은 음식이 어떻게 시대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밥'과 '빵'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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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탄수화물을 단순히 옹호하거나 비판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건강한 식사를 논할 때, 그 배후에 있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조건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탄수화물은 그러한 맥락에서 특히 흥미로운 영양소입니다. 같은 탄수화물이 어떤 시대에는 생명의 상징이었고, 어떤 시대에는 대사질환의 주범으로 비난받았으며, 또 어떤 시대에는 '선택적으로 복권'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영양학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아온 영양소가 있다면 아마 탄수화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수화물은 여전히 가장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에너지 공급원으로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소 입니다.


혈당 스파이크: 새로운 적의 등장

탄수화물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크게 변해왔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는 '혈당 스파이크'라는 개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혈당 스파이크란 식사 후 혈액 속 포도당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특히 흰쌀, 흰빵, 설탕 등 정제된 탄수화물을 섭취했을 때 이러한 반응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과연 정제 탄수화물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이들은 섬유질, 비타민, 미네랄이 대부분 제거되어 소화 속도가 매우 빠르고, 포도당으로 전환되어 혈액에 흡수되기까지의 시간이 매우 짧습니다. 그 결과 혈당이 단시간에 급격히 상승하게 되는 것이죠.


혈당 스파이크라는 개념은 1980년대에 처음 등장했으며,
당시에는 당뇨병 환자들의 인슐린 반응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 들어 저탄수화물 식단이 유행하면서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주목받게 되었고,
혈당 반응이 체중 증가, 피로감, 면역력 저하 등과 연결된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저속노화 식단과 같은 항노화 식이요법에서
노화, 염증, 만성질환의 '가속 스위치'로까지 간주되고 있습니다.


탄수화물의 생물학적 역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탄수화물은 생산적인 노동과 뇌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산업 노동자들에게는 빵, 감자, 오트밀, 옥수수빵 같은 탄수화물 기반 식품이 생존의 상징이자 권장 식품이었습니다. 당시 '탄수화물 제한'은 일부 상류층에서 의료적 목적을 위해 시도되었을 뿐, 대다수에게는 탄수화물 중심 식단이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탄수화물은 단순히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장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체가 에너지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작동하는 연료입니다.
특히 우리 뇌는 포도당 없이는 단 한 순간도 기능하지 못합니다.


저혈당 상태는 집중력 저하뿐 아니라 심할 경우 생명 유지 자체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탄수화물은 회복력 면에서도 돋보입니다. 탄수화물은 글리코겐 형태로 간과 근육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 곧바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지방보다 훨씬 빠르게 동원될 수 있는 연료인 것입니다. 게다가 응급 의료 상황에서는 포도당 수액이 생명을 살리는 기본 조치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에너지 대사의 핵심

인체는 하루 약 58킬로그램의 ATP를 생산하고 소비합니다. 이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 640그램의 포도당이 필요하며, 일반적인 음식의 수분 함량을 고려할 때 약 2.1킬로그램의 식사를 통해 이 양을 확보해야 합니다.

포도당은 이러한 막대한 에너지 수요를 가장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연료입니다. 물론 단백질이나 지방도 에너지원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 몸은 포도당을 선호하며 지방의 사용은 가급적 미루려 합니다.


탄수화물에 대한 시대별 인식 변화

탄수화물에 대한 생리적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오늘날 이 영양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제부터는 '탄수화물'에 투사된 시대별 가치와 상징을 통해 그 기준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왜 바뀌었는지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1860년대: 밴팅 다이어트의 등장 – 절제는 도덕이다

1860년대, 영국의 장례업자 윌리엄 밴팅은 자신의 체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단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고탄수화물 식품—설탕, 전분, 맥주, 우유, 버터—를 제한하고, 고기, 생선, 채소, 드라이 와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식단으로 체중을 20킬로그램 이상 감량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Letter on Corpulence』라는 팸플릿으로 정리해 세상에 알립니다. 이 팸플릿은 단순한 체중 감량 사례집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산업화가 한창이던 도시 사회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몸', 곧 중산층 남성의 비만이 무절제함과 도덕적 나약함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밴팅의 식단은 그 시대의 윤리적 불안과 맞닿아 있었고,
절제와 자기통제의 미덕을 입증하는 일종의 생활 방정식처럼 읽혔습니다.


"Are you Banting?"—당신도 식이절제 중인가요? 그의 이름은 곧 동사로 쓰이며 다이어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밴팅 다이어트는 단지 건강 관리가 아니라 신분과 인격을 증명하는 자기관리의 서사였습니다.


1940~1970년대: 국가가 권장한 탄수화물 중심 식단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복구기에 접어들며 각국 정부는 국민 건강을 위한 기본 식단(Basic 4)을 구성합니다. 이 시기에는 곡물, 빵, 시리얼 같은 저장 가능한 식량이 권장되었고, 이는 학교 급식과 군 식단, 저소득층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이었습니다. 탄수화물은 영양 공급과 비용 효율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식량으로서의 위상이 매우 높았습니다.


2000년대 이후: 탄수화물은 다시 의심의 대상이 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비만과 2형 당뇨의 유병률이 폭증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권고대로 먹었는데 왜 우리는 더 아파졌을까?" 그 결과 GI 다이어트, 로우카브, 아트킨스, 케톤식 등의 저탄수화물 식단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정제 탄수화물(흰쌀, 흰빵, 시리얼 등)은 집중 비판을 받게 됩니다.

문제의 핵심이 지방이 아니라 탄수화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탄수화물이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고,
이는 결국 지방 축적과 대사장애로 이어진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유행이 아니라 국가의 영양 권고 자체에 대한 신뢰 위기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참고로 문제가 되는 시기의 식이 권장안은 1977년 미국 식이 목표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의 섭취를 줄이는 대신 총 열량의 55~60%를 탄수화물로 채우라는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탄수화물은 '지방을 몰아내기 위한 대안'으로 부각되었고, '저지방·고탄수화물' 식품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근: 탄수화물의 선택적 복권 – '좋은 탄수화물'이라는 새로운 서사

최근에는 장내 미생물(마이크로바이옴)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탄수화물 자체보다 어떤 종류의 탄수화물이냐가 중요하다는 담론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능의학 의사 라파엘 켈만(Raphael Kellman)은 『The Microbiome Diet』를 통해 장내 세균이 대사와 정서, 면역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며 좋은 탄수화물은 오히려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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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특히 통곡물, 귀리, 보리, 렌틸콩, 바나나, 아티초크, 고구마 등
소화되지 않고 대장까지 도달하는 섬유질 탄수화물에 주목합니다.
이들은 장내 유익균의 먹이가 되어 염증을 줄이고 면역력을 높이며
대사 건강을 개선하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가공식품, 정제당, 인공감미료 등은 장내 환경을 교란하고 만성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식품이라도 시대에 따라 권장되거나 기피되며, 그 기준은 과학이라기보다는 문화, 도덕, 정치, 심지어 경제 논리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단맛에 대한 진화적 갈망

설탕 한 조각에 기꺼이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단순한 식탐이 아니라 수백만 년 진화의 결과입니다.

다른 맛 성분은 1% 이하의 농도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반면,
단맛은 10% 이상이어야 우리가 '달다'고 인식합니다.
즉, 인류는 생존을 위해 많은 양의 당을 섭취할 수 있도록
단맛에 둔감한 방향으로 진화해온 것입니다.

이러한 진화적 특성은 역설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에 와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단맛을 감지하기 위해 높은 농도가 필요하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당분을 찾게 됩니다. 아침마다 자동으로 손이 가는 크림빵이나 쉽게 끊지 못하는 흰 설탕과 흰쌀밥이 바로 그 예입니다. 설탕이 전 세계 감미료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생성한 포도당을 설탕으로 전환하여
체관을 통해 각 기관에 전달합니다.
결국 모든 식품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근간에는 설탕의 맛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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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덕분에 식물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식물을 먹은 초식동물과 다시 그 동물을 섭취한 육식동물, 잡식동물인 인간이 생존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흰쌀밥과 소고기 미역국은 생일에나 겨우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단지 귀해서 그토록 갈망했던 걸까요? 사실 백미는 소화 효소에 의해 빠르게 분해되어 포도당으로 전환되는 음식입니다. 즉, 소화가 쉽고 속이 편한 음식입니다. 맛은 단지 미각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적응의 결과물입니다. 인체는 소화가 잘되고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식을 본능적으로 선호합니다.


풍요의 시대, 과잉의 딜레마

설탕과 백미는 오랜 세월 우리 곁에 있었지만, 지금처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수백만 년 역사 속에서 이처럼 음식이 풍요로운 시기는 불과 백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를 거치며
인체는 필요량보다 조금 더 먹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진화적 세팅에 맞지 않는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필요량보다 많이 먹고 있고,
그로 인해 다양한 건강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탄수화물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진짜 적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수백만 년간 생존을 도왔던 그 본능이 이제는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부족의 시대에는 축복이었던 것이 풍요의 시대에는 저주가 되었고, 한때 생명을 구했던 갈망이 이제는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것은 탄수화물의 문제가 아니라 급작스럽게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 본성의 딜레마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되었든 스스로 인간의 진화와 문명의 발전 속도의 차이를 조절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만성질환을 가속시킨다는 혈당 스파이크를 줄이는 식사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또한 탄수화물이 뒤집어 쓴 억울한 누명 중 일부라도 벗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래봅니다.


*혈당 스파이크를 줄이는 실천 방법

이러한 혈당 스파이크를 줄이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도 존재합니다.

첫째, 통곡물, 채소, 콩류 등 혈당지수(GI)가 낮은 음식을 중심으로 식단을 구성합니다.

둘째, 식사 순서가 중요합니다. 채소를 먼저, 단백질을 그다음, 탄수화물을 마지막에 섭취하면 혈당 상승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셋째, 섬유질이나 건강한 지방과 함께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흡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헐적 단식과 같은 식사 간격 조절 전략은 인슐린 감수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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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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